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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축복[이준식의 한시 한 수]〈90〉

입력 | 2021-01-01 03:00:00


섣달 농가의 술이 탁하다 비웃지 마소. 풍년이라 손님 드릴 닭과 돼지고기 넉넉하다오.

산 첩첩 물 겹겹, 길이 없으려니 했는데 짙은 버들 환한 꽃, 마을이 새로 펼쳐지네.

피리와 북소리 이어지니 봄 제사 곧 있겠고 차림새 소박한 걸 보니 옛 풍습이 남아 있네.

이젠 자주 한가로이 달빛 속을 노닐지니 밤에라도 지팡이 짚고 무시로 남의 대문 두드리겠지.

莫笑農家臘酒渾, 豊年留客足鷄豚. 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 衣冠簡樸古風存. 從今若許閑乘月, 주杖無時夜叩門.

―‘산서촌을 노닐다(遊山西村)’ 육유(陸游·1125∼1210)




금나라에 밀려 중원에서 쫓겨난 남송(南宋) 조정에서 시종 북벌을 주장했던 육유. 당쟁 와중에 탄핵을 받아 마흔을 넘긴 나이에 낙향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인근 마을의 수려한 자연 풍광과 넉넉한 인심에 흠씬 도취된 듯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험난을 무릅쓰고 시인은 첩첩산중을 지나고 굽이굽이 개울을 건넌다. 더 이상 길이 없나 보다 하며 멈칫하는 사이 눈앞에 펼쳐지는 우거진 버드나무 숲과 화사한 꽃들의 향연, 풍년제를 앞둔 흥겨운 풍악 소리, 예스러움이 오히려 정겨운 사람들의 차림새, 이 모든 경이로움 앞에서 시인의 희열감은 한껏 고조된다.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삶의 환희, 막다른 지경을 헤쳐 나왔기에 누리는 삶의 축복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려니. 그래서인지 시인은 달빛을 즐기며 아무 때고 남의 집을 찾아 나서겠다는 달뜬 기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장수를 누린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육유는 시 9200여 수를 남겨 최고 다산 시인으로 꼽히는데 이는 이백의 1000여 수, 두보의 1400여 수, 백거이의 2900여 수를 압도하는 분량이다. 흔히 도연명은 전원시인, 이백은 낭만시인, 왕유는 산수시인이라 부르는데 육유에게는 애국시인이란 영예가 뒤따른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