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농가의 술이 탁하다 비웃지 마소. 풍년이라 손님 드릴 닭과 돼지고기 넉넉하다오.
산 첩첩 물 겹겹, 길이 없으려니 했는데 짙은 버들 환한 꽃, 마을이 새로 펼쳐지네.
피리와 북소리 이어지니 봄 제사 곧 있겠고 차림새 소박한 걸 보니 옛 풍습이 남아 있네.
莫笑農家臘酒渾, 豊年留客足鷄豚. 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 衣冠簡樸古風存. 從今若許閑乘月, 주杖無時夜叩門.
―‘산서촌을 노닐다(遊山西村)’ 육유(陸游·1125∼1210)
금나라에 밀려 중원에서 쫓겨난 남송(南宋) 조정에서 시종 북벌을 주장했던 육유. 당쟁 와중에 탄핵을 받아 마흔을 넘긴 나이에 낙향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인근 마을의 수려한 자연 풍광과 넉넉한 인심에 흠씬 도취된 듯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험난을 무릅쓰고 시인은 첩첩산중을 지나고 굽이굽이 개울을 건넌다. 더 이상 길이 없나 보다 하며 멈칫하는 사이 눈앞에 펼쳐지는 우거진 버드나무 숲과 화사한 꽃들의 향연, 풍년제를 앞둔 흥겨운 풍악 소리, 예스러움이 오히려 정겨운 사람들의 차림새, 이 모든 경이로움 앞에서 시인의 희열감은 한껏 고조된다.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삶의 환희, 막다른 지경을 헤쳐 나왔기에 누리는 삶의 축복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려니. 그래서인지 시인은 달빛을 즐기며 아무 때고 남의 집을 찾아 나서겠다는 달뜬 기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