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약속한 날 터미널에서 만나 내 차로 밭으로 가기로 했다. 키가 큰, 단정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첫눈에 왠지 호감이 갔지만 저 호리호리한 아가씨에게 어떻게 농사일을 시키나 싶었다.
“이 세이지들을 포도나무 사이사이 심는 것부터 해보라고요? 네, 좋아요!” 아가씨는 세이지 몇 포기를 들고 포도밭 저쪽 어디로 사라진다. 내가 한 오십 포기를 심고 그쪽으로 가니 아직도 그 몇 포기를 다 심지 못했다. 곱게 땅을 파고, 세이지를 심고, 다독다독 흙을 덮고, 나뭇잎을 덮고, 요리조리 제대로 되었나 살피느라 시간이 그렇게 든 것 같았다. 나무를 완벽하게 심었지만 일이 정말 더뎠다. 풀을 베어 눕힐 때도 어찌나 곱게 베어 눕히는지 이 아가씨가 지나가면 밭둑이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렇게 풀을 베어서는 1년 내내 해도 다 벨 수 없을 것이다.
자급자족을 꿈꾸는 아가씨는 새벽에 일어나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그 빵도 직접 구워서 만든 것이었다. 놀랍게도 밀가루에 물을 넣어 천연효모를 살려내서 반죽을 한 밀가루 발효종 빵이었다. 밭에 와서는 저쪽 어디서 쪼그리고 앉아 땅을 파고 무엇인가를 한참 하고 있는데 가보면 별로 한 것이 없다. “저 일머리 너무 없죠.” 아가씨는 이렇게 말하며 웃는다. 그렇게 합류한 아가씨와 함께 우리는 여름 한철을 통과했다. 폭우 속에서 함께 포도를 땄고 풀을 베고 나무를 심었다. 가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했다. 어느새 식구가 되었다.
“이 꽃은 뭐죠? 처음 보는 꽃인데 너무 예뻐요!” 밭에 가면 아가씨는 나비처럼 돌아다닌다. 두 손으로 꽃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그 손으로 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한다. 새로운 풀이라도 올라오면 금방 알아차리고 ‘이건 뭐죠?’ 하고 묻는다. ‘글쎄 잡초겠지!’ 나는 그렇게 섬세한 아줌마가 아니다. 아가씨는 밭에서 딴 못생긴 오이나 토마토를 천금처럼 귀하게 받들어 음식으로 만든다. 이 아가씨가 가장 밝은 표정을 지을 때는 내가 음식물 찌꺼기 통을 줄 때이다. “이거 밖에 갖다 버릴래?” 무슨 보물 박스를 받은 것처럼 명랑하게 “네에!” 하고 들고 나간다. 세상에 음식물 찌꺼기를 들고 퇴비더미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또 있을까? 없다!
가끔 시내버스 시간을 못 맞추어 터미널에 데리러 갈 때가 있다. 고맙습니다. 나직하게 말하면서 조수석에 오르는 아가씨가 참 사랑스럽다. 세 개의 계절이 지났지만 농사 실력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아으, 그렇게 일머리가 없어서 어쩌냐.”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실이에요 사실!” 하고는 깔깔 웃는다. 그리고 자신은 사교성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사교성은 최고인 듯하다.
“아, 눈 덮인 포도밭을 아직 못 봤어요. 서울에서 너무 보고 싶었어요!” 세상에 이런 아가씨가 하나 더 있을까? 없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가씨가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이 아가씨의 자급자족 앞날은 어떻게 펼쳐질지, 올해 우리 와이너리는 또 어디로 갈지, 인생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는 후회 없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