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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 ‘여유 있으면 땅을 사는 것이 좋다’ 농민 울린 이 한마디

입력 | 2021-01-05 11:40:00

1923년 10월 12일





플래시백
‘여유(餘裕) 유(有)하면 토지(土地)를 매수(買收)함이 가(可)하다.’ 1920년대 초 지주들 사이에 오갔던 말입니다. 약 100년 전 전체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던 농업사회에서 논을 중심으로 한 토지집중이 극성이었다는 반증이죠. 일제강점기에는 지주와 땅이 없는 소작인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서로 조직을 만들어 지주는 더 많은 이익을 거두기 위해, 소작인은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죠.

소작인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들어와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었죠. 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확립했다는 토지조사사업 결과 땅 매매가 한결 쉬워지고 잦아지게 됐습니다. 토지대장에 세세한 정보가 들어 있어 직접 가보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게 되자 투기매매가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죠. 1920년 토지 거래 건수는 3년 전보다 56%나 늘었습니다.





지주들은 돈을 은행에 맡기기보다 땅을 사들이는 편이 더 수지맞았습니다. 정기예금 이자보다 토지투자수익률이 더 높았거든요. 쌀값은 오르내려도 공산품 가격보다 변동이 크지 않았고 생소한 산업에 투자하느니 계속 땅을 쥐고 있겠다는 관성도 작용했습니다. 일제가 밀어붙인 산미증식계획은 지주에게 유리했죠. 저수지를 파고 새 농사기술이나 품종 화학비료를 쓰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지주는 감당해도 소작인은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의 앞선 농법을 전파한다며 데려온 일본 농민에 밀려 우리 농민이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죠. 못된 지주들은 소작료 인상도 모자라 세금이며 이런저런 부과금을 소작인들에게 떠넘기기 일쑤였죠. 소작료가 수확량의 70~80%나 되기도 했습니다. 한 해 농사지어 소작료 내고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었죠. 자작농이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27일자에 소개된 전남 순천군 농민들의 결의사항은 소작인들의 고충을 역으로 알게 해줍니다. ①소작료는…총수확의 40% 이내로 하라 ②지세와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하라 … ④지주는 소작인에게 무상노동을 요구하지 말라 … ⑥지주는…소작인을 멸시하지 말라 ⑦소작권은 함부로 옮기지 말라 ⑧지주는 몰상식한 마름을 쓰지 말라 등이었죠.

이런 가운데 경북 영주의 지주 강택진이 땅 9000여 평을 소작인회에 기부한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강택진은 동아일보 1923년 4월 26일자에 “그것(땅)을 내가 가지고 있던 까닭에 한없는 죄를 지었다. 이제부터 양심의 비판대로, 제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말했죠. 그가 길거리 아이스크림 장사에 나섰다는 소식이 두 달 뒤인 6월 26일자에 소개됐습니다. 하지만 강택진과 같은 지주는 정말 드문 사례일 뿐이었죠.




동아일보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와 보성과 연희전문 강사를 지낸 경제학자 선우전의 ‘조선의 토지겸병과 그 대책’ 시리즈를 53회 연재했습니다. 선우전은 조선총독부와 은행의 자료를 토대로 토지집중의 현실을 고발하고 대표적인 대책으로 미국의 가산(家産)제도를 제시했죠. 농민의 토지 일부를 가산으로 지정해 매매와 양도 저당을 금지하고 어쩔 수 없이 팔아야 한다면 정부에 넘기거나 저리 대출을 받도록 하자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기지로 만들려는 한 지주의 착한 뜻도, 외국의 좋은 제도도 소용이 없었죠. 총독부는 소작인들의 생존권 투쟁에 뒷짐만 지었고 소란이 일어나면 경찰이 개입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3년 10월 12일자 사설에서 지주-소작인 갈등을 수습할 소작법령의 제정을 촉구했죠. 일제가 소작조정령을 만든 것은 9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원문
小作法令(소작법령)을 制定(제정)하라
小作爭議(소작쟁의)의 調停策(조정책) 如何(여하)


今年(금년) 秋期(추기)에 入(입)한 以來(이래)로 各地(각지)의 小作團體(소작단체)나 地主會(지주회)가 여러 가지 决議事項(결의사항)을 續發(속발)케 되얏다. 그 决議事項(결의사항)의 內容(내용)은 勿論(물론) 地域(지역)을 따라 區々不一(구구부일)한 것은 事實(사실)이나 大體(대체)의 主眼点(주안점)은 서로 共通(공통)한 絡脈(낙맥)이 自在(자재)하다. 卽(즉) 小作料(소작료)의 比率問題(비율문제)와 小作權(소작권)의 保障(보장)에 關(관)한 것이 그 主要問題(주요문제)이요 其他(기타)의 細小(세소)한 여러 가지 附隨的(부수적) 懸案(현안)을 列擧(열거)하얏다. 如何間(여하간) 小作會(소작회) 對(대) 地主會(지주회)의 對立(대립)이 서로 旗皷(旗鼓)를 整齊(정제)하야 大(대)히 氣勢(기세)를 張(장)케 된 것은 將次(장차) 來頭(내두)의 小作爭議(소작쟁의)가 頗(파)히 紛紏(분규)케 될 것을 預(예)히 暗示(암시)한다. 이때까지의 經過(경과)로써 보면 小作爭議(소작쟁의)의 紛紏(분규)는 三南一帶(삼남일대)가 尤甚(우심)하얏고 西北鮮地方(서북선지방)은 比較的(비교적) 反響(반향)이 少(소)하얏다. 如何間(여하간) 朝鮮(조선)의 小作問題(소작문제)는 朝鮮(조선)의 産業問題(산업문제)와 社會問題(사회문제) 中(중) 가장 重大(중대)한 者(자)이다.

朝鮮産業(조선산업)의 大宗(대종)은 어느 点(점)으로 보든지 農業(농업)이다. 全人口(전인구)의 八割(팔) 以上(이상)을 占領(점령)한 것이 農業者(농업자)이라 하면 農業者(농업자)의 休戚(휴척)과 盛衰(성쇠)가 곳 全朝鮮人(전조선인)의 休戚(휴척)과 盛衰(성쇠)를 代表(대표)하는 것은 다시 贅言(췌언)할 必要(필요)가 無(무)하다. 이와 가치 朝鮮(조선)의 多大數(다대수)를 占領(점령)한 農業者(농업자) 中(중)에 다시 그 內容(내용)을 細別(세별)하면 全體(전체) 農業者(농업자)의 七割(7할) 六分(6분)이 自作(자작) 兼(겸) 小作農(소작농)과 純小作人(순소작인)이오 爾餘(이여)의 二割(2할) 四分(4분)이 所謂(소위) 地主階級(지주계급)에 屬(속)하얏다. 輓近(만근) 十數年來(십수년래)의 趨勢(추세)로써 보면 土地兼併(토지겸병)의 事實(사실)이 實(실)로 日增月加(일증월가)의 感(감)이 有(유)한 것은 否認(부인)치 못할 事實(사실)이다. 卽(즉) 이와 갓흔 土地兼併(토지겸병)의 事實(사실)이 農業(농업)에 對(대)한 資本主義的(자본주의적) 集中(집중)을 意味(의미)하는 것이요 따라서 資本主義的(자본주의적) 搾取(착취)의 事實(사실)이 漸次(점차) 그 端緖(단서)를 發(발)케 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갓흔 搾取(착취)의 事實(사실)에 對(대)하야 如何(여하)한 對策(대책)을 講究(강구)할 것인지는 다만 小作階級(소작계급)뿐의 問題(문제)가 아니다. 卽(즉) 廣汎(광범)한 意味(의미)의 全朝鮮人(전조선인) 問題(문제)이요 이 問題(문제)의 解决(해결) 如何(여하)가 全朝鮮人(전조선인)의 休戚(휴척)과 死活(사활)이 달린 것을 可知(가지)하겟다.

勿論(물론) 小作制度(소작제도)의 解决(해결) 如何(여하)가 朝鮮農村(조선농촌) 振興策(진흥책)의 全部(전부)는 아니다. 卽(즉) 分配問題(분배문제)를 中心(중심)으로 한 小作問題(소작문제)와 同樣(동양)으로 重要(중요)한 것은 生産問題(생산문제)를 中心(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技術(기술)의 向上(향상) 發達(발달)을 充分(충분)히 考慮(고려)치 안 할 수 업다. 그러나 이와 갓흔 生産增殖(생산증식)의 方策(방책)을 圖(도)하랴면 적어도 小作制度(소작제도)의 安固(안고)를 確立(확립)케 한 然後(연후)의 事(사)이다. 卽(즉) 小作制度(소작제도)의 改善(개선)이 生産增殖(생산증식)의 先决條件(선결조건)인 것을 絶呌(절규)치 안 할 수 업다. 그러면 現今(현금) 朝鮮(조선)에 잇서 小作制度(소작제도)의 現狀(현상)은 如何(여하)한가 하면 여러 가지 缺陷(결함)이 너무나 多々(다다)할 것은 勿論(물론)이다. 卽(즉) 小作制度(소작제도)에 對(대)한 何等(하등)의 依據(의거)할 法令(법령)도 無(무)할 뿐 아니라 一般(일반)히 準用(준용)하는 在來(재래)의 慣習(관습)이 또한 不備不完(불비불완)한 것이 事實(사실)이다. 따라서 輓近(만근) 數年來(수년래)의 各地(각지)의 小作紛糾(소작분규)에 對(대)하야서도 一般官廳(일반관청)은 殆(태)히 束手觀望(속수관망)의 態度(태도)를 取(취)하얏다. 甚至於(심지어) 엇더한 地方(지방)에서는 小作團體(소작단체)를 指目(지목)하야 所謂(소위) 不逞鮮人(불령선인)의 巢窟(소굴)과 가치 蛇蝎視(사갈시)하고 여러 가지 直接間接(직접간접)의 高壓策(고압책)을 取(취)하기도 하얏다. 그 結果(결과) 事態(사태)의 紛紏(분두)는 더욱く 蔓延(만연)케 된 類例(유례)도 업지 아니하얏다.

試觀(시관)하라. 各地(각지)의 小作會(소작회)와 地主會(지주회)와의 决議(결의)를 對比(대비)하야 如何(여하)히 意見(의견)의 間隔(간격)이 多大(다대)한 것을 이와 갓흔 意見(의견)의 間隔(간격)이 决(결)코 單純(단순)한 示威的(시위적) 策略(책략)으로만 看做(간주)할 것이 아니로다. 目下(목하) 各地(각지)의 執穗期(집수기)를 當(당)하야 地主小作間(지주소작간)의 意見(의견)이 互相(호상) 一致(일치)치 못하고 結局(결국) 雙方(쌍방)의 軋轢(알력)과 反目(반목)이 더욱々々 激致(격치)케 될 것이면 當局者(당국자)로써 如何(여하)한 善後(선후)의 收拾策(수습책)을 講究(강구)할 것인지 大(대)히 考慮(고려)할 바이다. 이와 가튼 見地(견지)에 잇서 當局者(당국자)의 腹案(복안)이 如何(여하)한지를 切問(절문)코저 하는 同時(동시)에 朝鮮(조선)의 小作制度(소작제도)에 關(관)한 法令(법령)의 制定(제정)을 時急(시급)히 考案(고안)하기를 促(촉)치 안 할 수 업다.


현대문
소작법령을 제정하라
소작쟁의의 조정책은 어떠한가


올해 가을에 들어온 이후로 각 지역 소작단체나 지주회가 여러 가지 결의사항을 연이어 내놓게 됐다. 그 결의사항의 내용은 물론 지역에 따라 제각각인 것은 사실이지만 큰 주안점은 서로 공통 요소가 있다. 즉 소작료의 비율문제와 소작권의 보장에 관한 것이 주요 문제이고 기타 자잘한 여러 가지 부수적 현안을 열거했다. 하여간 소작회와 지주회의 대립이 서로 깃발과 북을 나란히 하여 크게 기세를 늘리게 된 것은 장차 다가올 소작쟁의가 자못 어지럽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한다.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면 소작쟁의의 분규는 삼남일대가 아주 심했고 서북지방은 비교적 반향이 적었다. 하여간 조선의 소작문제는 조선의 산업문제와 사회문제 중 가장 중대한 것이다.

조선산업의 근본은 어느 점으로 보나 농업이다. 전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 것이 농민이라고 할 때 농민의 안락과 근심, 흥함과 쇠함이 곧 전 조선인의 안락과 근심, 흥함과 쇠함을 대표하는 것은 다시 군더더기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 중에 다시 그 내용을 세분하면 전체 농민의 76%가 자작 겸 소작농과 순 소작인이고 그 나머지 24%가 이른바 지주계급에 속했다.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 이래의 추세로 보면 토지집중이 실로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즉 이와 같은 토지집중의 사실이 농업데 대한 자본주의적 집중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사실이 점차 그 실마리를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착취의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대책을 강구할 것인지는 다만 소작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다. 즉 넓은 의미의 전 조선인의 문제이고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가 전 조선인의 안락과 근심, 삶과 죽음이 달린 것은 충분히 알겠다.

물론 소작제도가 어떻게 해결되는가가 조선 농촌 진흥책의 전부는 아니다. 즉 분배문제를 중심으로 한 소작문제와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생산문제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기술의 향상 발달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산증대의 방책을 꾀하는 것은 적어도 소작제도의 튼실한 안정을 확립하게 한 연후의 일이다. 즉 소작제도의 개선이 생산증대의 선결조선인 것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현재 조선에서 소작제도의 현상은 어떠한가 하면 여러 가지 결함이 너무나 크고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소작제도에 대해 의지할 법령은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따르는 재래의 관습 또한 불비하고 불완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몇 해 전부터 최근까지 수년 동안 각 지역의 소작분규에 대해서도 일반관청은 거의 수수방관의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어떤 지방에서는 소작단체를 지목해 이른바 불령선인의 소굴처럼 사갈시하고 여러 가지 직간접의 고압책을 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사태의 어지러움이 더욱더욱 번지게 된 유례도 없지 않았다.

살펴보라, 각 지역의 소작회와 지주회와의 결의를 대비해 어떻게 의견차가 큰 지를. 이와 같은 의견의 간격을 결코 단순한 시위적 전술로만 간주할 것은 아니다. 현재 각 지역의 추수기를 맞아 지주-소작 간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쌍방의 알력과 반목이 더욱더욱 격렬하게 치닫게 되면 당국자로서 어떤 뒷수습 방안을 강구할 것인지 크게 고려할 일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당국자의 복안은 어떠한지를 간절하게 묻는 동시에 조선의 소작제도 법령을 시급하게 연구하기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