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가 본 전단금지법과 새해 남북관계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북한 소설 ‘아, 조국’(2004년)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기 좋아하는 나라”로 남한을 묘사하는 구절이 나온다며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법정이나 현실 정치 영역에선 놔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공저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을 출간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이진영 논설위원
―올 3월 30일 발효되는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미국 영국 일본을 포함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반대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나라 밖 정보를 얻고 한국 드라마와 음악도 즐겨야 하는데 이런 지적 정서적 박탈도 인권 유린이다.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크게 놀라는 순간이 6·25전쟁을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다. 8·15 광복도 김일성이 일본을 물리친 덕분인 줄 안다. 이런 사람들 입장은 생각 않고 전단금지법을 만드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북한이 대북전단을 문제 삼았나.
“휴전선 전광판 없애라는 北요구 DJ정부때 인권문제 앞세워 거부”
―국제 사회의 비판에 여권이 ‘내정 간섭’이라고 반박했다.
“1970년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한국 민주화 문제를 다룰 땐 진보진영에서 환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단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국제적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면 어떻게 되나.
“미 정부의 직접적인 조치가 따르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유민주 국가들과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이다. 불똥이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로 튈 수 있다. ‘북한 인권 유린은 괜찮고 일본의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해선 국제 사회에 지원을 바라나’라는 냉소가 나올까 걱정이다.”
“입법했으니 교류하자고? 얼마나 구차한가. 북한 요구 들어준다고 관계가 잘 풀리나. 오히려 북한은 ‘이렇게 다루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정상회담 해주고 백두산 같이 올라가 주고, 아니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하고, 이렇게 하면 쉽게 움직이는구나 싶을 것이다. 친구든 부부든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남북 관계도 상대방 말만 들어준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할 말은 해야 한다.”
“경찰로 넘어간 대공수사, 약화 우려 南도 블레이크 같은 이중간첩 가능”
―국가정보원법 개정으로 유예 기간 3년이 지나면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된다.
“북한이 국정원 폐지해 달라고 줄곧 요구해 왔는데 결국 국정원도 무력화돼 버렸다. 북한이 군사력 다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간첩을 양성해 보내는 것이다. 간첩을 색출해야 남한 사회를 허물겠다는 북의 의도를 막을 수 있는데 걱정이다. 김대중 정부 때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이 간첩을 열심히 잡아야 햇볕정책도 성공한다’고 했다.”
“요즘은 활동하기가 훨씬 편해져서 많이 보낼 것 같다. 비용도 남한에서 충당한다고 들었다. 옛날처럼 강압 수사하는 관행이 사라진 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있어서 물증 없이 기소하기 어렵고 (교도소) 들어가 봤자 몇 년 안 살고 나온다. 간첩들도 다 알기 때문에 잡히는 것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에 돌아가 어떤 대접을 받을지를 겁낸다.”
―최근 영국과 소련의 이중간첩이었던 조지 블레이크가 사망했다. 영국 MI6 요원이던 그가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분노해 전향했다’는 자서전 내용이 새삼 화제가 됐다.
“MI6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미군 폭격에 충격을 받았다고? 엉터리 얘기다. 미군의 농촌 폭격은 공산주의 국가가 흔하게 써먹는 선전용 일화다. 영국 정부 인사에게 들은 바로는 블레이크가 10대 후반에 식구들과 영국으로 이민했다고 한다. 집안이 반파시스트 운동을 해서 가능했다. 소련 KGB에서 MI6에 들어가는 훈련을 받고 이민 간 것이다.”
―라 교수가 “우리 국정원에도 ‘북한판 블레이크’가 있다”고 말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단정적으로 말한 것으로 잘못 보도돼 해당 신문사가 인터넷에서 내용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 동독 슈타지 간첩이었던 귄터 기욤이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비서까지 했다. 우리도 내부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국정원의 권한 축소는 국정원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정치에 개입하고 대공 수사와 관련해 증거를 조작한 일도 있었다.
“국정원이 잘못한 일도 많지만 국정원을 나쁘게 만든 건 ‘정권정보원’으로 악용한 정치인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에도 우리 쪽에 와서 정보를 주는 안기부 직원들이 있었다. 우리 쪽도 그걸 이용하고 집권한 후로는 그를 중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직원 인사가 능력이 아니라 정권과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이뤄지기 쉽다. 국정원 개혁이 아니라 정치권의 개혁이 필요하다.”
―북한의 제8차 당 대회를 맞아 군중집회가 예고돼 있다. 얼마 전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수만 명이 모여 새해맞이 행사를 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할 텐데 주민 안전은 뒷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코로나 통제를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참석하는 군중집회는 주민들로선 큰 부담이다. 오전 10시에 행사를 시작하려면 집회 참가자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 행사장에 한번 들어가면 김정은 신변 안전 문제로 화장실도 못 가기 때문에 밥도 조금만 먹고 비닐봉지를 둘씩 들고 간다. 보안 체크는 3번 한다. 보안성 경찰, 보위부, 마지막으로 경호대가 샅샅이 뒤진다.”
―코로나와 대북제재 장기화로 경제 사정이 어려울 텐데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올까.
“경제가 어려워 외부에 손 벌려야 하는 형편인데 코로나 때문에 받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타협적으로 나올까. 북한은 어려워지면 오히려 큰소리치고 공격적으로 나서는 성향이 있다.”
“도움 받아야 하는 쪽 자존심 생각해 쌀이나 백신 지원 땐 조용히 줘야”
―정부가 식량과 백신 지원 의사를 밝혔는데 반기지 않는다.
“북한이 동독 정도의 자신이 있으면 교류가 쉬울 텐데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쌀이나 백신을 주면 고마워할까. 미운 사람에게 도움 받아야 하는 그들의 자존심은 생각 안 하나. 떠들고 생색내지 말고 조용히 줘야 한다. 얻어먹으면서도 원한이 쌓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정부가 북한과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남북한 갈등은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갈등이다. 우리는 북한과 한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은 자기네가 단군민족, 김일성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결혼을 큰 죄로 여기는 것도 순수한 혈통을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처녀지’라는 소설에 ‘처녀지를 개간하려면 호미가 아니라 쟁기로 깊이 갈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북 관계도 정상들이 악수한다고 쉽게 풀리는 게 아니다. 서독도 동독 인프라 개선 도와주고, 양심수를 돈 주고 데려오는 일 등을 소리 없이 하다 정상회담이 이뤄진 건 통일 되기 직전이었다. 정치인들이 자꾸 앞에 나설 게 아니라 작은 교류와 협력 관계부터 쌓아 나가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깊게 관여하지 않았나. 역사상 최초의 남북한 정상회담을 이뤄냈는데….
“첫 정상회담 이듬해인 2001년 북한에서 소설 ‘만남’이 나왔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아는 성공적인 회담과는 딴판이다. 김대중이 불순한 동기로 북한에 왔으나 김정일의 당당한 대응에 기가 질려 굴복하고 돌아간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한국 운동권 출신 기자가 소련이 망하는 것 보고 전향했는데 김정일 만난 다음 다시 운동권이 됐다는 내용도 있다. 이희호 여사의 조카인 이영작 박사는 햇볕정책에 대해 ‘김정일에게 속은 것’이라고 했다. 외투 속에 칼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외투를 벗기냐면서. 남북 관계는 정치 9단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남북 화해를 정말 원한다면 정상회담 하고 기념품 주고받는 것보다 북한 주민들이 바깥소식을 알고 한국 드라마도 즐길 수 있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라종일 약력△서울대 정치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정치학 박사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해외·북한담당 차장
△노무현 정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
△주영국 대사, 주일본 대사
△우석대 총장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