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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車생산업체서 혁신 모빌리티 기업으로… 정의선 ‘벽’을 넘다

입력 | 2021-01-06 03:00:00

2021 새해특집
[재계 세대교체, 디지털 총수 시대]
<3>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지난해 회장에 오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51)은 4일 신년사에서 “2021년은 신성장동력으로 대전환이 이뤄지는 해”라고 선언했다. 이어 “자유로운 이동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신기술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1, 2년 현대차그룹은 ‘전통 자동차 기업에서 혁신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신하는 대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의 급격한 확산, 우버 같은 모빌리티 기업의 등장으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뀐 데 따른 것이다. 현대차그룹에서 20년 이상 일한 한 고위 임원은 “회사가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 거라고는 얼마 전까지 상상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 순혈주의 깨고 문턱 없는 협업… 현대차의 파격

정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현대차의 수출이 본격화되던 1999년 현대차에 입사했다. 아버지로부터 품질경영을 배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정 회장은 현대차의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디자인 경영’과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 출범이 대표적이다.

본격적인 변화는 2018년 9월 수석부회장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현대차만의 ‘군대식’ 문화를 자유로운 테크 기업식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2019년 복장자율화를 시행하고 직원들과 타운홀 미팅을 여는 등 파격이 시작됐다.

적극적인 외부 인재 수혈에 나선 것도 정 회장이 주도한 변화로 꼽힌다. 부사장급으로 영입돼 현재는 사장급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독일 BMW 출신 알버트 비어만 연구개발본부장과 삼성 출신 지영조 전략기술본부장 등이 대표적이다. 기술자 중심의 사일로 조직이라는 평가를 받던 현대차 조직이 변신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해 회장 취임 직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이상수 현대차 노조위원장과 회동한 것도 파격 행보로 꼽힌다.

외부 기업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습도 눈에 띄는 변화다. 지난해 재계를 달군 4대 그룹 총수들과의 연쇄 회동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정 회장은 지난해 5∼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 대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직접 찾아가 만나면서 배터리 분야 등에서 협력을 모색했다.

재계 관계자는 “본격적인 3세 경영이 시작된 한국 재계가 글로벌 산업 변화에 발맞춰 협력을 도모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며 “그 구심점에 그동안 보수적인 행보를 보여 온 현대차그룹이 있었다는 점도 눈에 띄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 수직계열화에서 오픈 모빌리티 기업으로

‘쇳물에서 자동차까지’는 한국 제조업의 상징인 현대차그룹을 대표하는 구호였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철강부터 자동차부품 및 완성차 생산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해 효율적인 자동차 생산에 집중해 왔다.

충성도 높은 조직과 자체 연구개발(R&D)이 그 핵심 열쇠였다. 이런 전략은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 공격적인 해외 진출로 연결돼 현대차그룹이 세계 5위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은 달라졌다. 정 회장은 지난해 “자동차를 넘어 이동과 관련한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품질을 앞세운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 기업이라는 과거의 비전에서 벗어나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과거엔 상상하기 힘들었던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을 공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다’는 정 회장의 생각을 보여 주는 모습이다.

현대차그룹은 2019년 9월 미국의 자율주행업체 앱티브와 20억 달러(약 2조3000억 원)씩 자산을 출자해 ‘모셔널’을 세웠다. 직접 개발로는 도달하기 힘든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 확보를 위해 거액을 ‘베팅’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이 협력으로 자율주행 기술 순위 15위권에서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지난해 말엔 1조 원을 투입해 ‘로봇개’로 유명한 미국의 로봇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에 나섰다.

2019년 직원들과 가진 타운홀 미팅에서 정 회장은 △자동차 50% △개인용 비행체(PAV) 30% △로보틱스 20%를 미래 계획으로 깜짝 공개했다. 현대차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하던 이 계획은 지난해 실물 크기의 PAV 모형을 공개한 데 이어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로 현실화하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3월 모교인 샌프란시스코대 경영대와의 인터뷰에서 “익숙한 것을 벗어나는 걸 주저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자동차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로보틱스와 도심항공 모빌리티(UAM) 등을 포함한 새로운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이미 공급 과잉으로 평가받는 자동차 시장에 테슬라와 애플 같은 새로운 경쟁자가 뛰어들고 있다”며 “크고 복잡·정밀한 제품을 생산하는 분야에서 축적된 기술과 인력이 있는 현대차의 강점을 살려 모빌리티 전반을 품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시보단 질문 던져… 직원들과 소통 활발


정의선 ‘외유내강의 리더십’
소통 중시하고 의견 경청하지만 사업 결정 내릴땐 주저않고 과감



“겸손과 경청이 몸에 배어 있지만 과감한 결정을 내릴 땐 주저하지 않는 외유내강(外柔內剛) 리더십.”

지난해 10월 회장에 취임한 정의선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회사 안팎의 평가다. 평소 임직원들과 e메일 소통을 즐기는 정 회장은 간단하지만 분명한 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적이고 세세한 지시보다는 “고객 입장에서 최선인지 고민해 보자” 같은 질문을 던진 뒤 해답을 찾는 스타일이다. 고위 임원들과의 회의에서는 주로 듣는 역할을 자청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최근 1조 원을 들여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를 결정한 뒤에는 고위 임원들에게 “미래 세대를 위해 글로벌 최고 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정몽구 명예회장 측근으로 꼽히던 김용환, 정진행 두 부회장이 물러나도록 하고 신사업을 책임질 인사를 대거 전진 배치했다. 회장 취임 이후 첫 인사에서 확실한 경영 장악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 회장은 다른 주요 그룹 총수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사업적인 구상을 함께 나누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전을 최소화하고 임직원 가족과 식사할 때는 테이블을 돌면서 직접 와인을 따라줄 정도로 겸손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큰 장점으로 꼽힌다. 재계 관계자는 “정 회장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직접 받을 정도로 오랫동안 경영 수업을 받아 왔다”며 “최근 접촉이 잦은 정·관계에서도 겸손하고 소탈한 모습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도형 dodo@donga.com·변종국·서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