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박 나포 사태 배경
‘정부 위의 정부‘로 불리는 막강한 권력의 이란 혁명수비대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순찰 임무를 맡은 혁명수비대 소속 해군이 주로 타국 선박을 나포해 왔다. 사진 출처 IRNA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 이란 국내법 앞세운 억류
이란이 내세운 나포의 법적 근거는 무엇일까? 이란은 1958년 유엔 해양법협약 서명국이다. 이 협약에 따르면 연안국은 자국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영해를 항해하는 국제 선박의 통항 편의를 보장하게 돼 있다. 이른바 무해통항권이다. 항행 선박이 연안국에 해(害)를 미치는 행동과 관련된 사안은 해양법협약 19조 2항에 규정돼 있다. 1993년 이란은 이를 다시 자국 국내법인 해양지역법(Marine Area Act) 제정으로 더욱 상세하게 규정했다. 6조에 군사훈련, 첩보활동, 측량활동 등을 비롯해 10가지 금지 사안을 열거하고 있다. 대부분 군사 관련 조항이거나 어업이나 해상 거래 등 경제 이익 침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하나가 눈에 띈다. ‘환경오염’이다. 해양법협약에서 규정한 유해 사유인 ‘고의적이고도 중대한 오염 행위’와 연관된다. 신속하게(expeditious), 멈춤 없이(continuous) 통과하는 외국 선박들에 대해 군사·경제 활동을 제외한 이유로 문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사안이다. 이란이 이번 한국케미호 사건에 적용한 혐의다. 한마디로 우리 선박이 이란 영해에서 고의적으로 해를 끼쳤다는 근거로 끄집어낸 셈이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나포 근거로 이야기한 해양 오염 지역은 호르무즈해협의 이란 해역 항행로 근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가 지나는 바다 중 하나다. 무엇보다 걸프지역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이란 적대국의 선박을 비롯해 미국 5함대 항모전단이 드나드는 길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란은 눈에 불을 켜고 선박들의 항행을 감시하고 있다. 좁은 바닷길이다 보니 해양 오염에 예민한 지역이긴 하다. 평형수를 넣고 빼는 과정에서 간혹 유해물질 유출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민감한 지역에서 우리 선박이 해양 환경오염과 관련된 고의적 불법 행동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란 측이 아직 명확한 증거자료를 보여주지 않아 분명한 경위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란은 정치적 역학관계와는 상관없는 기술적인 사안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국가의 선박을 나포했을 때 발생할 파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는 없다.
○ ‘의도적’ 나포의 목적
두 번째 주장은 한국 계좌에 묶인 이란 석유 판매 대금을 돌려받기 위한 압박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 핵합의 파기 이후 강도 높은 제재와 압박을 지속했다. 일체의 대이란 금융거래가 중지됐고 7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 묶여 버렸다. 자산이 묶였으니 이란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일 수도 있다. 이란은 우리 측에 이 문제 해결을 거세게 요구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선박을 마치 인질처럼 잡고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가설이 나온 것이다. 지난 2년간 우리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묶인 석유 대금을 풀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민간 은행을 정부가 강권해서 설득할 수도 없다. 자칫 제재 위반으로 몰릴 경우 은행들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곧 백악관 주인이 바뀐다. 이란 핵합의 복귀를 공언한 바이든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보다는 유연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새 정부 출범까지 2주도 남지 않은 시간을 감안할 때 돈을 돌려받기 위한 인질극 운운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 번째 설명은 행위자, 즉 이란 혁명수비대의 배경을 중심으로 본 것이다. 이란 정치의 막후 권력인 혁명수비대가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고 마침 한국 선박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최근 혁명수비대에는 위기감이 커졌다. 든든한 배경이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노쇠화, 군부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의 사망 이후 리더십 부재, 최근 경제난 책임론 등 복합 위기다. 체제 수호의 최선봉인 혁명수비대는 이란 국민들, 특히 젊은층의 심각한 민심 이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오고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더 불안해졌다. 얼마 전 유력 핵과학자가 테헤란 근교에서 백주에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딱히 대응하지 못했다. 연초 이란의 적대국인 사우디가 걸프 왕정국가 수반들을 모아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단교 상태였던 사우디와 카타르가 가까워지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전파됐다. 이란과 가깝던 카타르가 사우디 쪽으로 회귀하는 것은 이란에 부담이다. 지역 정세, 특히 걸프 해역의 무게중심이 자칫 사우디로 이동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혁명수비대는 호르무즈해협 안쪽 영해에서 단호하게 일하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면서 내부 결속도 다잡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위기 결집에는 ‘적’ 그리고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가설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 한국에 쌓인 불만 표출
이란은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혁명수비대 내부 요인이 작동해서 벌인 일이라 해도 한국 선박을 나포할 때 일어날 국제적 반향과 시나리오를 계산했을 것이다.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고 ‘기술적’ 사안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 쪽의 분분한 해석과 여론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 단호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란이 기술적 문제로 국한하고 조사 및 법적 절차를 밟겠노라 선언한 사안을 우리가 정치적 수사학으로 대응하며 판을 키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관계 규명에 입각해 치밀하게 기술적, 법적 논리로 맞서야 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