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2월 26일
플래시백
1923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 들것이 들어왔습니다. 들것에는 한 처녀가 실려 있었죠. 그녀는 판사가 묻는 말에 신음에 가까운 소리만 낼 뿐이었습니다. 머리맡에 여동생이 쪼그려 앉아 언니의 대답을 듣고 전달해야 했죠. 동아일보 1923년 12월 26일자 2면 기사입니다. 그녀는 5월 12일 법정에 처음 나왔지만 재판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죠. 6월 30일 다시 불려나왔으나 병세가 여전해 재판이 중단됐죠. 6개월이 지났어도 차도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28세 이혜수. 이혜수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그해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상옥을 숨겨줬기 때문입니다. ‘숨 멎어서도 방아쇠는…항일시가전 호외’(2020년 11월 21일자)에 소개한 대로 김상옥은 매부 고봉근의 후암동 집에 숨어 있었죠. 세입자의 밀고로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체포조인 유도사범 다무라를 사살하고 우메다, 이마세 두 경부에게 총상을 입힌 뒤 탈출했습니다. 김상옥은 맨발로 눈 덮인 남산을 넘어 효제동의 이혜수 집으로 간신히 숨어들었죠. 1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이혜수는 김마리아의 애국부인회에 참여했고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학살사건에 분노해 김상옥이 결성한 혁신단에도 함께 했죠. 이혜수는 발에 동상이 걸린 김상옥을 위해 방이 후끈하도록 불을 잘 때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동상이 악화되긴 했지만요. 이혜수의 부친은 활을 잘 쏘던 63세 한량이었고 모친 고성녀는 61세였습니다. 이혜수가 맏딸, 밑으로 여동생만 4명인 ‘딸 부잣집’이었죠. 둘째와 셋째는 공립보통학교 교사, 넷째는 한성은행에 다녔습니다. 열한 살 막내는 귀여움을 독차지했겠죠. 하지만 이 집의 평화는 곧 산산조각 났습니다.
1월 22일 새벽 일제 경찰 수백 명이 효제동 73번지 이혜수 집을 에워쌌죠. 경찰은 1월 17일 다무라가 제 힘만 믿고 무작정 들어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이혜수 가족더러 김상옥이 숨어있는 방문을 열라고 했죠. 가족이 벌벌 떨기만 하자 경찰은 “너희 집 식구를 전부 몰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폭탄으로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할 수 없이 막내딸이 방문을 여는 순간 김상옥의 권총이 불을 뿜었죠.
총알이 막내딸을 지나쳐 구리다 경부를 맞힌 순간 김상옥은 다락의 벽을 손으로 뜯어내고 옆집으로 피신했습니다. 효제동 73번지에서 74번지로, 다시 76번지로 벽을 뚫고 들어간 뒤 이 집 변소에 있다가 72번지로 넘어갔죠. 김상옥은 집주인에게 이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불로 경찰의 총알을 막으며 싸우려던 것이죠. 하지만 중과부적, 결국 그는 자결했습니다.
일제 경찰은 김상옥의 뒤를 캐려고 이혜수의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여동생 둘까지 끌고 가 심하게 고문했죠. 이혜수 등 딸 3명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문과 수치심도 못 견딜 일이었지만 환갑이 넘은 아버지 어머니가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울부짖을 때 더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이혜수 본인도 무지막지한 고문 끝에 늑막염 등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죠. 동아일보 4월 1일자 기사의 ‘무한한 고초를 겪어’라는 짧은 구절 속에 숨어있는 실상이었습니다. 법원은 ‘혁명부인’이라는 검사의 논고에 따라 징역 1년형을 때렸죠. 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렬은 고문과 복역으로 그녀가 청춘과 결혼을 희생했다고 훗날 전했습니다.
변론을 맡았던 김병로는 해방 뒤 대법원장 시절 한 여자가 면회를 와 만나보니 백발이 된 이혜수였더랍니다. 출옥 후 몇 년이 지나 몸은 회복됐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죠. 정부에 서민주택을 신청할 때 필요한 증명서를 써달라고 해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사실을 써줬다고 했습니다. 해방 뒤에도 가난에 허덕여 살 곳도 없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병로가 느낀 인생의 허무함과 사회의 냉정함은 그만의 감상은 아닐 듯합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원문
病床(병상)에 누은대로李惠受(이혜수) 孃(양) 公判(공판)
작일 오후 한시 디방법원에서
병상에 누은대로 사실을 심리
조선 텬디를 진동케 하든 김상옥(金相玉)사건의 관계자로 늑막염과 기타 신병으로 인하야 분리 심리케 되엿든 리혜수(李惠受)(二八‧28) 양의 공판은 예뎡과 가치 작 이십오일 오후 한시에 경성디방법원에서 공판을 열엇다. 삼시(三矢) 판사와 대원(大原) 검사가 림석하고 다수한 방텽자가 드러온 후 심리를 개시하엿는대 피고는 아직 신병이 쾌차치 못하야 『병인마차』를 타고 겨우 재판뎡에 와서 침상을 놋코 그 우에 누어 신음하는 소래로 다시 자긔 아우 리혜옥(李惠玉) 량의 말을 거처 재판댱의 뭇는 말을 대답하게 되엿다. 먼저 주소 성명과 전과 여하에 대한 문답이 잇슨 후에
金相玉(김상옥) 留宿(유숙)만은 事實(사실)이나
內容(내용)은 全然(전연) 不知(부지)
윤익중에게서 온 백원도
무슨 돈인지 모르고 바다
피고의 집에 김상옥이라는 사람이 작년 십일월부터 금년 일월 구일까지 류숙하엿는가?
그 날자는 자세히 모르오!
그러면 류숙한 일은 잇는가?
네- 잇소!
김상옥이가 조선독립을 위하야 조선에 드러온 줄을 알앗는가?
아지 못하오!
김상옥이 삼판통(三坂通)에서 순사를 죽이고 피고의 집에 왓슬 때에 그 내용을 알앗는가?
오기는 왓스나 순사를 죽인 일은 아지 못하오!
김상옥에게서 자긔가 순사를 죽이고 리태원(梨泰院)을 들너 남산을 넘어 피고의 집에 왓다는 이야기를 드럿는가?
듯지 못하엿소!
그러면 김상옥이 사람 죽인 범인인 줄을 아지 못하고 류숙식혓는가?
그럿소!
윤익중(尹益重)이가 김상옥에게 보내는 독립자금을 중간에서 밧아 김상옥에게 준 일이 잇지!
윤익중에게서 돈 백원을 밧아 김상옥에게 준 일은 잇스나 그것이 독립자금인 줄은 아지 못하엿소!
立會檢事(입회검사)
二年(2년) 求刑(구형)
사정은 동정하나
국법은 못 굽힌다
이것으로 피고에 대한 심문은 끗을 마치고 대원(大原) 검사로부터 피고는 사실을 부인하나 실상은 그러치 아니하야 김상옥이가 독립운동의 목뎍을 가지고 조선에 드러온 줄을 알고도 자긔집에 류숙케 하엿스며 또는 김상옥이가 삼판통에서 순사를 쏘아죽인 것을 알면서도 그후에 또다시 그를 자긔집에 류숙케 하엿스며 또는 그밧게도 여러 가지로 김상옥 사건에 만흔 로력을 한 것은 다톨 수 업는 일이라. 피고는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 『김마리아』의 『애국부인단』사건에도 만흔 활동을 하엿나니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혁명(革命)에는 부인의 활동이 만흔 효과를 내엿나니 피고도 그들 혁명부인 중의 한사람이라. 그 신상을 생각하면 심히 가련하야 금춘 이래로 신병으로 만흔 신고를 하엿고 또는 아직도 그 병이 쾌차치 못하야 겨우 뭇는 말이나 대답하는 처디에 잇는 터이라 그 사정은 매우 동정할 만하나 개인의 사뎡을 가지고 국법을 굽힐 수는 업다고 론고를 한 후에 징역 이개년의 구형이 잇섯더라.
一年(1년) 言渡(언도)
변호사의
변론이 잇슨 후 일년 언도
검사의 구형이 잇슨 후에 변호사 김병로(金炳魯) 김용무(金用茂) 량 씨의 간단하고도 비장한 변론이 잇섯스며 다시 재판장은 피고에게 무슨 할 말이 잇느냐 하고 물엇스나 피고는 아모 말도 업섯스며 재판댱은 즉석에서 징역 일개년의 판결을 언도하고 동 두시경에 폐회하엿더라.
현대문
병상에 누운 채로이혜수 양 공판
전날 오후 1시 지방법원에서
병상에 누운 채로 사실 심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했던 김상옥 사건의 관계자로 늑막염과 기타 신병으로 인해 분리 심리하게 되었던 이혜수 양(28)의 공판은 예정과 같이 25일 오후 1시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미쓰야 판사와 오하라 검사가 자리에 앉고 많은 방청객이 들어온 뒤 심리를 개시하였다. 피고는 아직 병이 낫지 않아 ‘병인마차’를 타고 겨우 재판정에 와서 침상을 놓고 그 위에 누워 신음하는 소리로 자기 아우 이혜옥 양의 말을 거쳐 재판장이 묻는 말에 대답하게 되었다. 먼저 주소 성명과 전과가 있는지에 대한 문답을 한 뒤에
김상옥이 묵었던 일만은 사실이나
내용은 전혀 몰라
윤익중에게서 온 100원도
무슨 돈인지 모르고 받아
―피고의 집에 김상옥이라는 사람이 작년 11월부터 금년 1월 9일까지 묵었는가?
“그 날짜는 자세히 모르오!”
―그러면 묵은 일은 있는가?
“예, 있소!”
―김상옥이가 조선독립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줄을 알았나?
“알지 못하오!”
―김상옥이 후암동에서 순사를 죽이고 피고의 집에 왔을 때 그 사실을 알았나?
“오기는 왔으나 순사를 죽인 일은 알지 못하오!”
―김상옥으로부터 자기가 순사를 죽이고 이태원을 들러 남산을 넘어 피고의 집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듣지 못했소!”
―그럼 김상옥이 사람 죽인 범인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재워주었나?
“그렇소!”
―윤익중이가 김상옥에게 보내는 독립자금을 중간에서 받아 김상옥에서 준 일이 있지!
“윤익중에게서 돈 백 원을 받아 김상옥에게 준 일은 있으나 그 돈이 독립자금인 줄은 알지 못했소!”
입회검사
2년 구형
사정은 동정하나
국법은 못 굽힌다
이것으로 피고에 대한 심문은 끝마치고 오하라 검사로부터 피고는 사실을 부인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김상옥이가 독립운동의 목적을 품고 조선에 들어온 줄을 알고도 자기 집에 머물게 했으며 또는 김상옥이가 후암동에서 순사를 쏴 죽인 것을 알면서도 그 후에 또다시 그를 자기 집에 묵게 하였으며 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김상옥 사건에 많은 노력을 한 것은 다툴 수 없는 일이다. 피고는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 ‘김마리아’의 ‘애국부인단’ 사건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혁명에는 부인의 활동이 많은 효과를 내었으니 피고도 그들 혁명부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신상을 생각하면 아주 가련해 올봄 이래로 신병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고 또는 아직도 병이 낫지 않아 겨우 묻는 말이나 대답하는 처지에 있어 사정은 매우 동정할 만하다. 그러나 개인의 사정을 놓고 국법을 굽힐 수는 없다고 논고를 한 뒤 징역 2년을 구형하였다.
즉석 판결로
1년 언도
변호사의
변론이 있은 뒤 1년 언도
검사가 구형을 한 뒤에 변호사 김병로 김용무 두 사람의 간단하고도 비장한 변론이 있었고 다시 재판장은 피고에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피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재판장은 즉석에서 징역 1년의 판결을 언도하고 오후 2시경에 폐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