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은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세기 후반부터 간헐적으로 육지로 나가서 물질하는 해녀가 있었고, 1910년 이후 활발해졌다. 1890년대부터 일본 잠수기 어선 수백 척의 남획으로 제주어장에는 채취할 해산물이 부족했다. 당시 육지 사람들은 미역 이외의 해조류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제주해녀는 해산물이 풍부한 내륙으로 눈을 돌렸다. 초창기에는 경상, 전남 해안 위주로 물질을 했으나 점차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원정물질을 다녔다. 바깥물질하는 해녀가 늘어나면서 현지 주민들과 분쟁이 발생했다. 그 이면에는 상권 확보를 위한 해조상인 간 갈등이 있었다. 결국 비용을 지불하고 해산물을 채취했지만 입어료가 점차 인상돼 어려움을 겪는 해녀가 늘어났다. 이에 제주 유지들은 해녀조합을 조직해 한동안 해녀 권익보호를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인 도지사가 조합장을 겸하던 해녀조합은 1920년대 후반부터 오히려 해녀를 수탈하는 조직이 됐다.
부산 영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해조류 상인들은 해초의 수급 안정이 필요했다. 제주해녀를 모집해 영도에 집결시켰다가 기장, 울산, 경주, 포항 등 해산물이 풍부한 어촌으로 보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 광복 후에도 제주도민이 영도로 대거 이주했다. 동아일보(1970년 7월 25일자)에서 “물질 원정 왔다가 정착, 영도는 주민의 8할이 제주계(濟州系)”라고 했다. 필자가 가덕도에서 만난 해녀 4명도 이 시기에 영도로 이주했다. “가덕도 끝을 넘어가면 등바당을 넘어간다. 다대 끝을 넘어가면 부산 영도이로구나.” 해녀노래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서도 최종 목적지는 영도다. 제주도민회관, 제주은행, 해녀문화전시관이 영도에 있는 것만 봐도 제주도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영도는 작은 제주도라 할 만하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