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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위에 쓴 이름[이재국의 우당탕탕]〈49〉

입력 | 2021-01-19 03:00:00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딸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졸업식으로 대체하게 됐고, 부모들은 유튜브 라이브로 졸업식을 관람할 수 있었다. 졸업생 한 명, 한 명 영상으로 찍은 인사말이 나왔다. 재학생 대표의 송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아쉬울 정도로 빨리 끝나고 졸업식도 끝이 났다. 초등학교 6년을 마무리하는 날인데, 아쉬웠다.

딸의 졸업식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내 초등학교 졸업식날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다. 삐삐도 없고 집전화밖에 없던 터라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졸업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편지를 들고 그 친구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괜히 학교 운동장에 와서 빈 교실을 기웃거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드디어 졸업식 전날. 그날도 주머니에 편지를 넣고 그 친구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그 친구가 나오는 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그 친구에게 다가가는데 그 친구 뒤에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나오시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서 전속력으로 도망을 쳤다. 한참 도망치다 생각해 보니 ‘그 애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집에 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울었다. 짝사랑이 아파서 울었고 첫사랑이 바보 같아서 울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폭설 예보가 나왔고,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운동장에 눈이 쌓이면, 넉가래를 가져가서 세상에서 제일 큰 글씨로 그 친구 이름을 써 놓자. 그럼 그 친구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그걸 보게 되고, 나는 그 친구에게 ‘나의 고백’이라고 편지를 쓰면 끝!

오후 10시가 넘어서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나는 알람시계를 오전 4시로 맞춰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넉가래를 들고 몰래 집을 빠져나와 학교에 갔다. 운동장은 하얀 도화지처럼 펼쳐져 있었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에 그 친구의 이름을 썼다. 모두가 감동할 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백이 될 거야. 그렇게 이름을 다 썼을 때쯤,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서 보니, 학교 경비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아침 운동을 하고 온 것처럼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졸업식에서 입을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창밖을 보니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졸업식 시작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내가 쓴 그 친구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운동장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아, 눈 덮인 나의 고백이여! 나는 밤을 새워 졸업식 내내 졸음이 쏟아졌고, 지금도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면 죄다 졸린 눈으로 찍은 사진뿐이다. 아, 그래서 그 친구에게 편지를 줬냐고? 못줬다. 이건 하늘과 나, 그리고 경비 아저씨만 알고 계신 나의 졸업식 추억이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