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연출가 탁현민이 또 잘난 척을 했다. 청와대 의전비서관 자격으로 18일 대통령 신년회견을 연출한 다음 날 “이제는 당연해진 ‘조율 없는 기자회견’도 이전 정부들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페이스북에 자만심을 분출한 거다.
불통의 전임 대통령보다 쇼통의 문재인 대통령이 훨씬 많이, 훌륭히 기자회견을 해왔음을 알리려는 충정은 알겠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과거 두 대통령보다 많이, 무려 9번이나 기자회견을 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이번 회견까지 7번이 팩트다. “자기가 연출한 쇼의 횟수와 헷갈린 듯”하다는 게 단국대 의대 서민 교수 지적).
‘사전에 예정된 질문을 주고받던 기자회견’이라고 탁현민이 과거 정부 때 행사를 은근히 조롱하는 것도 불편하다. 중요한 건 기자가 국민을 대신해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을 대통령에게 캐물었고, 그래서 대통령의 정직한 답변을 끌어냈느냐다.
이달 18일 온·오프라인 혼합 방식으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해야 할 질문’ 못 하면 기자단 망신
2015년 신년회견. 박근혜 대통령은 답변 도중 “그런 바보 같은 짓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된다”고 동생 박지만을 향해 모질게 경고했다. “정윤회 씨가 비선 실세인가, 아닌가? 박지만 회장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앞으로 친인척 관리를 강화할 건지 말해 달라”는 질문이 나와서다(돌아보면 참 부질없긴 하다. 대통령이 그런 바보 같은 짓에 말려들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만일 이번 회견에서 “문 대통령의 30년 절친을 위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에 대통령은 어디까지 관여하셨습니까?” 같은 질문이 나왔다고 상상해보라. “대통령이 월성 1호기는 언제 폐쇄되느냐고 물어서 공무원들이 무리하게 폐쇄를 했다.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 추궁했다면 문 대통령은 뭐라고 답했을까. 대통령이 대충 얼버무릴 경우 보충질문으로 캐물었다면?
6년 전 날카로운 질문과 (약간의) 솔직한 답변은 청와대 기자단이 ‘질문 내용과 질문자, 그리고 순서는 기자단이 정하기’로 홍보수석실과 미리 합의했기에 가능했다. 이것이 탁현민이 우습게 본 ‘조율’이라면 조율이다.
그러고는 외교·안보, 국내정치, 경제, 사회, 긴급 현안으로 분야를 나눠 국민이 궁금해할 질문거리를 정하는 기자단 회의를 무지하게 했다. ‘해야 할 질문’이 누락됐을 때 기자단 전체가 당할 후과를 본능적으로 직감해서다(이지운 서울신문 국제부 전문기자 관훈저널 기고). 그러나 질문지를 청와대에 전달하진 않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 푸틴에게 묻는다 “나발니 독살했나?”
지난해 12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대통령궁)에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된 연례 기자회견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 기자회견은 4시간 30분 간 이어졌다. 러시아대통령 홈페이지
“당신의 딸과 전 사위, 또 당신과 가까운 이들의 부패 탐사보도가 계속 나온다. 사실인가?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사건에 러시아 정부가 연루된 의혹이 있다는 해외 보도가 최근 나왔다. 러시아정부는 왜 조사하지 않는가? 누가 독살(하려)했나? 말해 달라.”
친정부 매체인 라이프뉴스 기자가 작년 말 쏟아낸 질문이다. 그러고도 멀쩡한 걸 보면 날카롭게 묻되 푸틴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짰을지는 알 수 없다. “‘베를린 환자’는 미국 정보당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 러시아 특수요원들이 그를 처단하기를 원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푸틴의 답변이 여기서 나왔다. 딸 관련 보도 역시 부인한 건 물론이다.
그러나 먼 후일이라도 사실은 밝혀진다. 독재자는 그때 거짓말 했다고 역사에 남는다. 기자가 꼭 알아야 할 것을 권력자에게 물어야 하는 이유다.
● 탁현민의 쇼에 전 국민이 넘어가야 하나
탁현민 대통령의전비서관. 동아일보DB
청와대 출입기자 경험은커녕 대기만 하는 기자인 내가(‘대기자’거든요)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긴 하다. 다만 청와대 기자단 총간사쯤 되면 맨 먼저 광나는 질문이나 하는 특권을 즐길 게 아니다. 꼭 해야 할 질문을 할 수 있게 조율하는 ‘구습’도 필요하다. 대통령을 담당하는 기자들에게 기대하는 독자들이 아직 많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