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라 회랑’ 한국구역 항공주권 회복
변종국 산업1부 기자
이 제주 남단 하늘길 관제권을 37년 만에 온전히 한국이 갖게 됐다. 한국 비행정보구역(FIR·관제 비행정보 등을 관리하는 책임 공역)인데도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각자 관제를 하던 어정쩡한 구역이었다. 관제 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비행기 사고가 날 뻔한 상황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한국 관제권이 된 항로는 1983년 제주 남단 공해에 설정됐던 ‘아카라 항공회랑(AKARA Corridor)’이라는 곳이다. 언뜻 보면 국민 생활과 큰 상관이 없는 업계 이슈로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항공 안전 확보와 직결된 문제라 의미가 크다. 항공 회랑은 무엇이며, 도대체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중국-일본이 한국 비행구역에 만든 하늘길
이 중 ‘회랑(Corridor)’으로 부르는 특별한 항로가 있다. 일부 지역에서 항로 설정이 곤란해 특수하게 설정된 하늘길이다. 일반 항로는 여러 선로가 겹쳐졌지만 회랑은 다르다. 복도, 좁은 통로라는 단어 뜻처럼 정해진 특정 고도로만 비행이 가능하다. 일반 항로가 여러 차선의 고속도로라면 회랑은 단차선 도로인 셈이다.
제주 남단 항공회랑이 바로 이런 곳이다. 중국 상하이(上海)와 일본 규슈(九州)를 잇는 하늘길로 ‘아카라∼후쿠에 항공회랑’, 흔히 ‘아카라 항공회랑’으로 부른다.
아카라 회랑은 1983년에 설정됐다. 동서로 길이 515km, 폭 93km다. 이 중 절반가량인 257km는 엄연히 한국 비행정보구역(FIR)이지만 관제는 중국과 일본이 나눠 맡았다. 동경 125도를 기준으로 서쪽은 중국이, 동쪽은 일본이 관제를 담당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다. 중국의 요청으로 회랑을 만들 당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중재하긴 했지만 한국의 주장은 잘 먹히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 의견으로 만들어진 하늘길이 바로 아카라 회랑이다.” 한국 비행정보구역 안의 중국∼일본 하늘길에 한국이 논의에서 배제된 배경이다.
한국은 남북을 오가는 항공기만 관제를 할 뿐 동서로 이동하는 항공기는 바라만 봐야 했다. 국내 항공업계에서는 “내 집 마당으로 다니는 차를 스스로 감시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다른 지역에도 항공회랑은 몇 곳이 있다. 1945∼1990년 서베를린과 서독을 이어주던 3개의 서베를린 항공회랑, 이스라엘 영공을 통과해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잇는 회랑, 파키스탄 공역을 거쳐 인도∼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회랑 등이 대표적이다. 국가 간 분쟁 지역이 많다.
○ “지나가는 비행기 글씨가 보인다” 아찔한 순간
게다가 이 회랑은 한국∼동남아 항로와 열십자(+) 모양으로 네거리처럼 겹쳐 있다. 한국∼동남아를 오가려면 반드시 제주 남단을 거쳐 아카라 회랑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한국∼동남아를 오가는 항공기를 합치면 아카라 회랑 부근에만 하루 평균 8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지나 다녔다. 그런데도 관제권은 한중일이 제각각 행사하다 보니 관제 소통이 원활하게 안 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2018년 7월 27일 베트남 다낭을 출발해 대구로 향하던 한국 모 항공사 비행기가 제주 남단으로 접근했다. 이때 아카라 회랑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던 한 화물기가 일본 관제 허가 없이 임의로 고도를 높였다. 이 화물기의 갑작스러운 고도 이탈에 대구행 항공기는 급하게 선회비행을 해야 했다. 당시 두 항공기 간 수직 거리는 불과 1100피트(약 330m). 자칫 항공기 충돌이라는 초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2019년 6월에는 제주를 거쳐 중국으로 이동하던 비행기(한국 관제)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국동방항공(중국 관제) 비행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고도를 높였다. 두 항공기 간 공중충돌 경고장치(ACAS)의 회피조언(RA)이 울려 사고는 피했다. 두 항공기 간 거리는 불과 7km. 자동차로 치면 말 그대로 ‘스칠 뻔한’ 순간이었다.
박상모 진에어 기장은 “제주 남단 아카라 회랑 부근은 항로가 너무 비좁아 위아래 1000피트(약 300m) 간격으로 비행기들이 마주보고 다닌다. 아래위 혹은 옆으로 지나가는 비행기 겉에 쓰인 글자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제주 남단에는 제트기류 때문에 터뷸런스(난기류)가 자주 발생한다. 피하고 싶어도 관제권이 나뉘어 있어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했다. 승객들도 불편하고 안전 위험도 컸다”고 지적했다.
○ 애타는 한국에 “큰 문제없다” 느긋했던 중일
한국으로서는 아카라 회랑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제를 일원화시켜야 했다. 이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오가는 항공기를 모두 한국이 관제해야 복잡한 하늘길을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과 일본 측에 관제권 조정을 위한 협상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측은 시큰둥했다. “우리는 불편한 게 없다. 안전에도 큰 문제가 없다. 비행 안전에 문제가 있다면 관제시스템 등을 보강하면 된다”는 게 양국 생각이었다. 그러자 ICAO 등 항공 국제기구가 나섰다. 이 지역에서 사고에 준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며 새로운 관제 협력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건 2015년이다. ICAO가 아카라 회랑을 ‘핫스폿(Hot Spot·비행위험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듬해 ICAO가 중심이 돼 관제권 이양 검토가 시작됐다. 2018년 10월에는 ICAO 의장 주재로 한중일 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항공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 논의였지만 외교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한 한중일 3국 간 논의는 쉽지 않았다. 김상도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실장은 “한중일 간 외교 논쟁이 불거지면 논의가 잘 안 될까 봐 걱정이 컸다. 급한 건 한국이라 더 그랬다”며 “ICAO 파견 경험이 있는 직원들의 국제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다. 중국과 일본 관계자들을 수차례 직접 만나고 편지도 수십 차례 보내면서 설득했다”고 말했다.
일본을 설득할 때는 도쿄 올림픽을 활용했다. 올림픽이 열리면 미주 유럽 중국 등에서 항공기가 대거 밀려들 텐데 ‘핫스폿’ 아카라 회랑을 그냥 두면 사고 위험이 높아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일본도 내심 아카라 회랑 문제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면서 논의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토부, 한국조종사협회(ALPA-K) 등은 중국 일본에 수차례 메일을 보내 협력을 촉구했다. 지난해 12월 25일 한중일 3국과 ICAO는 ‘아카라 항공회랑 안전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한국 하늘길 관제권을 37년 만에 되찾아온 순간이었다.
○ ‘항공 주권 문제, 협상으로 풀었다’ 평가
2단계로 아카라 항로를 대폭 넓힌다. 한국 비행정보 구역에 아예 새로운 항로를 만들기로 했다. 비좁던 편도 1차로 도로가 왕복 16차로 고속도로로 탈바꿈하는 격이다. 6월 17일부터 시행된다.
박상모 기장은 “조종사협회가 그간 아카라 항로 안전 문제에 꾸준히 우려를 표하며 논의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모든 기장들이 비행 시 애먹었던 항로였는데 안전 확보는 물론이고 운항 효율성도 크게 증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국과는 한중 관제 기관 간 직통선을 설치한다. 국제 규정에 맞는 관제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다. 그동안 한중 양국 간에는 정식 관제 협약이 없었다. 일부 노선에서는 한국을 출발한 비행기가 중국 관제권역으로 넘어갈 때 관제사가 아닌 항공기 기장이 직접 중국에 연락해 관제를 받았다.
정부는 과거 한국이 힘이 없던 시절 만들어진 회랑의 관제권을 되찾은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제주 남단지역 항공 안전을 개선하면서 한중 간 관제 시스템 정상화도 도모할 수 있게 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서로 간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항공 주권의 문제를 한중일 3국이 협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상도 실장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협상을 했다. 한중일 3국이 협력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고 말했다.
::항공회랑(Corridor)::정식 항로는 아니지만, 특정 고도에서만 비행할 수 있도록 지정된 하늘 길. 옛 동독, 이스라엘 등 분쟁 지역이나 관련국 간 관제 합의가 이뤄지기 힘든 지역에 설치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변종국 산업1부 기자 bj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