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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2030 세상/정성은]

입력 | 2021-01-26 03:00:00


정성은 콘텐츠제작사·‘비디오편의점’ 대표PD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엔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말이 나온다. ‘자식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의 나이는 들지 않은 그 짧은 시기.’ 올해 서른셋이 된 나는 책에 밑줄을 그으며 ‘지금 이 행복을 오래 누려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거리엔 응급차 소리가 자주 울렸다. 평소엔 관심 없던 그 소리에 마음이 타들어갔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바깥에 설치된 간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나 같은 사람들이 들어와 울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하며, 이 환자 가족은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저는요?” 묻자, 위독하거나 임종 직전의 환자 가족만 면회할 수 있다고 했다. ‘제발, 저는 부르면 안 돼요’ 생각하면서도 옆에 울고 있는 할머니에게 이 마음이 들킬까 가슴 아팠다.

어린 동생이 보호자로 들어가 있었다. 새벽에 아빠가 쓰러졌을 때 쿵 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신고해, 3분 만에 구급 대원들이 와서, 18분 만에 구급차에 옮겨, 10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고 했다. 대학병원과 경찰서가 근처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구급차가 들어오기 힘든 길이었다면, 누가 신고할 상황이 안 됐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운세도, 타로도 믿지 않아 기댈 곳이 친구들밖에 없었다.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친구는 말했지만 그저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됐다. 살면서 갔던 무수한 장례식이 떠올랐다. 어렸을 땐 그게 특별한 불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느낀다. 언젠간 모두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누구는 조금 일찍, 누구는 조금 늦게 겪을 뿐이라고.

검사 결과가 나왔다. 괜찮단다. 큰일 아니란다. 동생은 아빠와 찍은 셀카를 보냈다. 다행이다. 나는 다시 오지 않을 하루를 기록하기로 했다. 피 묻은 수건 빨기, 구급 대원들이 지나간 자리 청소하기, 영상편지 쓰기. 며칠 전 친구가 소원이 이루어지는 방법이라고 가르쳐준 게 있다.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그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느끼고 상상한 뒤, 그날에 대한 일기를 말로 녹음해 자기 전에 들어봐.’ 그게 뭐냐며 웃었는데, 울면서 하게 될 줄이야. ‘집에 오니 아빠가 요리를 하고 있어요. 내일은 친구들이랑 등산을 갈 거래요!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은 퇴원하면 읽는다더니, 하나도 안 읽네? 이럴 줄 알았어요!’ 내가 원하는 건 집에 오면 아빠가 있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내일은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할 계획이다. 평생 우리 가족의 운전기사는 아빠였는데, 이젠 내가 해야 할 것 같다. “황천길 갈 일 있나? 네가 모는 차 안 탄다!”던 아빠. 아빠 덕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