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산업1부 차장
적당히 잘 봐달라는 수준의 구애가 아니다. 새해 초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장(장관)에게 “독일 자동차 산업을 위해 TSMC에 반도체 생산을 늘려 달라고 해 달라”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대만 정부는 “세계 각국이 외교 루트로 증산 요청을 하고 있다. TSMC 등에 서둘러 달라고 촉구했다”고 알렸다. 미국 새 행정부가 중국에 대만 압박을 중단하라고 경고한 게 대만 반도체 산업 보호 목적이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중국 SMIC가 미국 제재를 받으면서 몸값은 더 높아졌다. 정보기술(IT) 기기용 반도체에 집중하는 삼성전자는 차량용 반도체가 주력 사업이 아니어서 시장점유율이 낮다.
유례를 찾기 힘든 반도체 품귀의 원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다. 집콕,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PC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 수요가 폭발했다. 반도체 수요는 늘어났지만 공급에는 한계가 따랐다.
차량용 반도체 대란은 얽히고설킨 글로벌 공급 사슬의 현실을 보여준다. 세계를 호령하는 선진국 자동차 메이커도 언제든 ‘슈퍼 을’이 된다. 3만 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을 전부 스스로 만들자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부 상황에 흔들리지 않을 공급 확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국가 기간산업인 자동차 산업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2년 전 일본의 수출 규제를 겪은 한국에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수백억 원 규모의 소재 수입 차질로 주력 산업이 마비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겪었다. 정부가 대대적인 소재·부품·장비 육성을 추진했지만 지난해 이 분야 일본 수입 비중은 1년 전보다 오히려 0.2%포인트 높아졌다.
외교 갈등 때문이 아니더라도 차량용 반도체 같은 부품 소재의 수급 불안정은 언제 어디서라도 발생할 수 있다. 일시적 수급 불안정이라는 이유가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이런 시기에 주력 산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정부와 산업계가 방기해선 안 될 임무다. 글로벌 공급 사슬에서 한국의 약점은 어디 있는지, 안정적 생산망을 담보하기 위해 정부와 산업계는 무엇을 할지 점검할 때다.
이상훈 산업1부 차장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