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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돈키호테로 만든 文의 예상 밖 신년회견[광화문에서/황형준]

입력 | 2021-02-03 03:00:00


황형준 정치부 기자

지난달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단연 하이라이트는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언급이었다.

“저의 평가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냥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다. 윤 총장이 정치할 생각을 하면서 검찰총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윤 총장 정직 2개월 징계안을 재가했던 문 대통령의 말이 맞느냐며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검찰의 조직문화나 수사관행을 고치라”며 윤 총장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나타낸 문 대통령의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과 온도 차가 컸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으로 ‘윤석열 때리기’에 앞장섰던 여권 인사들은 머쓱해졌다. ‘청와대 2인자’였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조차 문 대통령의 회견 나흘 전인 지난달 14일 윤 총장과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최재형 감사원장을 한데 묶어 “전광훈, 윤석열, 그리고 이제는 최재형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 터였다.

여권에서는 문 대통령 발언이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물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일제히 윤 총장에게 포탄을 퍼부은 것에 대해 일종의 ‘사격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24일 법원이 윤 총장 징계안에 대한 효력정지 결정을 내린 뒤부터 이미 여권 인사들은 “청와대가 이제 윤 총장을 그냥 놔둬야 한다”며 “월성 원전 1호기 수사를 하든 말든, 칼춤을 추든 말든 내버려두고 국정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상황이었다.

청와대는 지난해 말 후임 법무부 장관에 민주당 박범계 의원을 지명하는 등 두 차례 개각과 함께 대통령비서실장과 민정수석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진 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국정 쇄신이 이뤄지자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도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추 전 장관과 각을 세우면서 야권 대선 주자로 부각됐던 윤 총장도 정작 추 전 장관이 교체되자 야권 지지자들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추-윤 갈등이 사그라지고 윤 총장이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야권 잠룡들은 서울시장 후보를 놓고 뜨거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여권의 포탄을 맞으며 존재감을 키웠던 윤 총장이 전장(戰場)을 벗어나자 야권 대선 주자의 신기루가 벗겨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애당초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이후 야권 주자로 부각된 윤 총장을 향해 총공세에 나섰던 추 전 장관 등 여권 인사들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키호테’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얼마 전 윤 총장과 통화했다”며 “윤 총장이 ‘자기를 문 대통령이 임명했는데 어떻게 야당 정치인을 할 수 있냐’고 하더라”며 윤 총장의 야당행(行) 가능성을 낮게 봤다.

윤 총장이 향후 정치권에 입문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윤 총장의 정치적 입지를 키운 것은 ‘우리 편 수사는 안 된다’는 여권의 ‘내로남불’과 ‘편 가르기’였다.

민주당이 이번엔 법원을 타깃으로 삼아 판사 탄핵소추안 처리를 시도한다. 피아를 구분하는 적대적 사고방식만 앞세우다간 최재형 원장에 이어 ‘제3, 제4의 윤석열’이 생길지도 모른다.

황형준 정치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