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사법부 수장이 與눈치 보고 거짓말까지” 참담한 법원

입력 | 2021-02-04 12:10:00


김명수 대법원장이 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연루 법관 탄핵을 추진하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로 탄핵 당사자인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게 말하면서 사표를 반려했다는 논란이 4일 녹취록 공개를 통해 사실로 밝혀지면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법원 내부는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던 김 대법원장의 해명이 하루 만에 거짓말로 드러나자 큰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법조계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사법부 독립을 지켜야 할 대법원장이 오히려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헌법적 책무를 저버렸다며 사퇴 요구가 나오고 있다.

3일 언론 보도로 촉발된 이번 논란은 임 부장판사가 지난해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고 김 대법원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하면 탄핵이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는지가 핵심이다. 실제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그것 자체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대법원장이 나서서 침해한 것이 되기 때문에 엄청난 사건이 된다. 김 대법원장도 3일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에게 보낸 공식 답변서를 통해 “작년 5월말 임 부장판사의 요청으로 면담했으나 탄핵 문제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한 사실이 없다”고 의혹을 전면 부인한 바 있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한변) 관계자들이 4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판사탄핵 방조하는 대법원장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News1


하지만 임 부장판사 측이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면담 당시 김 대법원장이 ‘탄핵 상황 고려’를 말한 것이 사실이었다. 정면 반박이 하루 만에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난 것이다. 임 부장판사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해인의 윤근수 대표변호사가 4일 오전 공개한 녹취록에는 김 대법원장이 “탄핵이라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오늘 그냥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아”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 대법원장은 또 사법부 수장으로서 정치적 외풍을 막아야 할 헌법적 책무를 부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법관 탄핵을 추진한 여당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발언도 했다. 김 대법원장은 “지금 뭐 (여당에서)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라고 말했다.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수리할 경우 법원행정처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법관 탄핵을 추진하는 여당 의원들로부터 사표 수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질의를 받을 것을 우려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이 임 부장판사에 대해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임 부장판사의 과거 재판 개입 행위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사법권 독립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김 대법원장이 법관 탄핵을 추진하던 여권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발언이 공개됨으로써 법관 탄핵의 불똥이 대법원장에게 옮겨 붙는 양상으로 가고 있다.

임 부장판사는 2014년~2016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면서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을 칼럼으로 썼다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임 부장판사는 당시 재판부에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은 인정되지만 비방 목적은 없었다는 취지로 판결을 내리라고 지시했다는 의혹을 샀다. 

일선 법원 판사들은 어떤 정치적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할 대법원장이 여권의 정치 행위에 보조를 맞추려는 의도가 담긴 발언을 하면서 개인의 자유인 사직을 거부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또 이런 중대 사안에서 대법원장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원래 판사는 사실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 직업적 소명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몸에 배 있다”며 “그런데 일국의 대법원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