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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국가 명운 걸린 외교·안보마저 ‘정신승리’할 건가

입력 | 2021-02-05 03:00:00


이기홍 대기자


친문세력은 이제 ‘내로남불’ ‘이중잣대’의 차원을 넘어 ‘정신승리’의 경지로 접어든 것 같다. 이임식에서 ‘영원한 개혁’ 운운하며 눈물 흘리는 추미애와 “사랑해요”를 연창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은, 자기합리화·자기세뇌를 수없이 반복한 결과, 자신들이 날조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감격하고 희로애락을 나누게 된 집단최면의 경지를 연상케 한다. 집단심리학 연구의 대상으로 넘겨야 할 소재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아무리 환각 속에서 ‘정의봉(棒)’을 휘둘러도 폐해는 제한적·한시적이라는 점이다. 법원과 지식인들에 의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발가벗고 대로에서 몽상활극을 벌인 꼴이 됐다. 그 폐해는 선거 등의 심판을 통해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친문 특유의 정신승리적 접근법이 외교·안보에까지 적용될 경우 폐해는 무한대·영구적이 된다.

바이든 취임 후 한미 정상 첫 통화는 취임 2주가 지난 어제 이뤄졌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시진핑과 40여 분간 통화에서 중국 공산당 100주년을 축하했다.

중국 지도자와 먼저 통화하는 것이 갖는 상징성, 중국이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몰랐을 리는 없다. 앞으로도 미중 간에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해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는 “제3의 길” 얘기가 계속 나온다.

여권에선 트럼프 퇴장으로 미중 갈등이 한풀 꺾이고 한국의 균형자, 조정자 역할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실제 국제정세와 괴리가 큰 희망적 사고다.

미중 대립은 이 시대 국제질서를 규정짓는 핵심 프레임이 됐다. 냉전시대 미소(美蘇) 대립이나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뀐다고 사라질, 트럼프라는 일개 정권 차원의 갈등이 아닌 것이다. 과거 일본 등에 가했던 무역역조 시정 목적의 보복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역패권국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는 미국 외교의 기본 DNA가 시진핑 정권의 팽창주의·패권주의, 경제추월 위협과 결합해, 강한 적대감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에선 인권문제까지 추가돼 갈등과 대립은 더 까다로워질 것이다.

특히 미 민주당은 과거 미중수교(카터 행정부), WTO 가입 지원(클린턴) 등으로 중국의 성장을 도왔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 중국이 GATT 체제의 특혜를 누리면서 온갖 반칙을 저지르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민주주의 체제로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더 폭압적인 권위주의로 퇴행한 데 대한 배신감도 복합됐다.

세계는 미국 주도의 반중 동맹 대(對) 중국몽 추종 블록으로 나뉘고 있다. 서방세계와 일본 호주 인도 등은 확실하게 미국에 힘을 싣고 있다. 균형자, 조정자 운운하며 어정쩡하게 양쪽 다 다리를 걸치면 몸값이 올라가기는커녕 양쪽 모두로부터 무시받을 수 있다. 특히 미국과 밀당하려는 태도는 동맹의 신뢰 근간을 무너뜨릴 것이다.

한국이 대중 압박전선의 구멍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를 비롯해 고도로 분화된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축출된 중국이 한국의 인재와 기술 유입에 열을 올리지만 정권 핵심부가 중국몽을 칭송하는 분위기 속에서 국정원 등 관련기관들은 적극 나서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이 미국과 멀어질수록 북한의 위협은 차치하고라도 일본의 독도침탈, 중국의 서해침범 같은 국익 침탈 위험에 더 취약해진다. 남북관계에만 집착해 북핵을 사실상 묵인한다면 궁극적으로 일본의 핵무장과 군비증강 빌미를 줄 텐데, 미국 외에는 이를 견제할 균형추가 없다.

중국 압박 동참이 한국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줄 것이라는 공포도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공산당 지배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미 상당수 일류 기업들은 중국에서 빠져나와 베트남으로, 베트남에서 다시 인도로 향하고 있다. 대만이나 일본의 대중(對中) 경제교류가 여전히 활발히 이뤄지고 있음도 눈여겨봐야 한다.

중국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반중 전선은 가치 기반 민주주의 동맹이다.

문 정권의 친중 스탠스는 탈각하지 못한 이념적 잔존물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겪은 정체성 상실 트라우마, 유물론적 역사발전법칙에 대한 미련, ‘분단과 친일세력의 우군인 미국’에 대한 정서적 반감 등에 뿌리가 닿아 있다.

집권세력이 국제정세를 자기 원하는 방향으로 재해석해버리면 국가 항로가 왜곡된다. 이미 마차가 말을 끌 수 있다는 환상(소득주도 성장), 태양과 바람만으로도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환상(탈원전)으로 나라의 기둥 뿌리들이 뽑혀져 나갔다.

권력 치부를 감추기 위한 검찰장악을 개혁이라 분칠한 채 사랑해요를 외치든, 문재인보유국을 외치며 사미인곡을 부르든, 다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환각 상태에서 키를 잡고 항로를 입력해선 안 된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오랑캐 함선(제너럴셔먼호)을 격침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쇄국정책의 앞날을 자신했다. 그 배가 비록 함포를 장착했지만 승선원 20여 명의 민간 상선이었고,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다 화공(火攻)을 당했다는 팩트는 간과했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