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아이의 명절 스트레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명절 날 어른들은 거실에서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 5명은 건넛방에서 왁자지껄하며 놀고 있다. 아이들 나이는 12세, 10세, 9세, 7세, 5세. 둘씩 짝지어 잘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티격태격하며 시끄러워진다. 싸우는 듯하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작은집의 7세와 5세 아이들이다. 그런데 이럴 때 보통 “○○아∼” 하면서 가장 큰 아이 이름을 부르곤 한다. 큰아이들은 명절날 이런 상황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동생들끼리 놀다가 울거나 싸우면 그것이 마치 큰아이의 잘못인 양 이름을 호명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큰아이 이름을 부르는 것은 대표로 큰아이를 혼내고 비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방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얘들아, 시끄럽게 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큰아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다. 물론 큰아이 이름을 대표로 부르는 이유는, 큰아이에게 네가 가장 형님이니까 동생들이 조용히 놀도록 단속하라거나 사이좋게 놀도록 지도하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어쩌다 만나는 사촌 동생들을 다루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동생들이 말을 잘 듣지도 않는다. 큰아이는 여러모로 억울해진다.
옛날의 가부장제도 안에서는 “네가 큰형이 되어서 동생들 안 돌보고 뭐 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집 안의 큰 자식이 농사를 지으면서 식솔들을 모두 돌보고 나눠주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문화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옛날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에 맞춰,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맞다. 이때 아이 부모와의 사이를 고려해야 한다. 직접 나서도 오해를 받지 않을 사이라면, 아이들에게 가서 “잠깐만 좀 떨어져 봐. 큰엄마가 보니까…” 이런 정도로 개입해도 된다.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사이라면, 그 아이의 부모가 가서 직접 돌보게 하는 것이 좋다. “동서, 좀 가 봐. 애들이 투덕거리네(형님,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정도로 말을 꺼낸다.
만약 아이의 부모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그럴 때는 “내가 좀 가볼게. 동서(형님, 제가 좀 가볼게요)”라고 말하고는 “가만 있어보자. 너는 큰엄마랑(작은엄마랑) 저리 좀 가보자” 하고 싸우는 아이들을 좀 떼어놓는다. 우리 아이가 큰아이라면 “네가 얘하고 좀 있어 줘” 하면서 한 명을 데려가 “물이라도 먹자”면서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만 개입한다.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을 큰 소리로 혼내거나 훈육하는 것은 좀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오랜만에 동생들을 만나면 큰아이는 형님 노릇을 하느라 피곤하다. 친척들 다 모여 있는 곳에서 “얘가 오늘 얼마나 동생들을 많이 돌봤는지 아세요?”라고 공언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친척들이 있을 때 엄마가 조금 큰 목소리로 “오늘 애 많이 썼어. 어린 동생들이랑 노는 것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라고 말해주라는 것이다. 친척들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 그들의 생각이 바뀌느냐 바뀌지 않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내 아이한테 내가 어떻게 해주느냐가 중요하다. 부모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을 듣는 것이, 그 말을 듣지 못한 것보다 내 아이의 마음을 훨씬 편안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여전히 명절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힘든 시절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