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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열풍에… 한국 SF소설 선구자 문윤성 재조명

입력 | 2021-02-10 03:00:00

사후 20년만에 ‘문학상 공모전’ 이어 15일 소설집 ‘월드컵 특공작전’ 출간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747 점보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추락해 269명이 사망한다.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동생을 잃은 소설 속 주인공은 한 비밀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미국의 최신 전투기를 몰래 빼돌려 소련 본토에 잠입하자는 것. 주인공은 전투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스텔스 기술과 적이 쏘아올린 유도탄을 돌려보내는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며 소련과 맞선다.

15일 출간 예정인 문윤성 작가(1916∼2000)의 소설집 ‘월드컵 특공작전’(아작·사진)에 실린 중편소설 ‘소련 공습’의 일부다.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KAL기 피격 사건을 배경으로 문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1984년 발표한 공상과학(SF) 소설 작품. 미소 갈등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 있다.

최근 한국 SF 소설의 선구자인 문 작가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문 작가는 1965년 22세기를 배경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 최초의 SF 장편소설 ‘완전사회’를 썼다. 아동 SF 소설을 주로 써온 한낙원 작가(1924∼2007)와 함께 한국 SF 소설의 시작을 알린 1세대 작가다. 알라딘 서점은 지난달 31일 제1회 ‘문윤성 SF 문학상 공모전’을 마감하고 수상작을 심사 중이다. 아작 출판사는 15일 총 3권으로 구성된 ‘문윤성 걸작선 세트’를 내놓는다.

문 작가가 주목받는 건 최근 SF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교보문고의 SF 소설 판매량은 전년도에 비해 3배로 늘었다. 5일 한국 최초의 우주 블록버스터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가 공개된 것도 최근 SF 장르에 대한 높은 인기가 영향을 끼쳤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에 수록된 단편소설 ‘스펙트럼’은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이처럼 SF 소설을 기반으로 다양한 영화 등이 제작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박상준 초대 한국SF협회장은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치는 SF의 인기가 소설에서 시작해 영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SF의 원형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문 작가를 주목하는 이유다. 문 작가 등 1960년대 1세대 작가들은 추리소설에 과학적인 소재를 녹여 한국 SF의 첫발을 뗐다. 그러나 1970, 80년대 군사 독재정권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참여문학 기류가 거세지면서 SF 작가들은 사라져 갔다. 2000년대 치밀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SF를 쓰는 배명훈 김보영 등 2세대 작가가 등장했지만,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20세기 초 발달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SF 소설의 계보를 쌓아온 서양 문학에 비해 한국 SF 소설은 비주류였다.

그러나 최근 김초엽 천선란 등 3세대 SF 작가가 과학적 소재에 페미니즘, 소외계층 등 현실의 이야기를 담으며 SF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최근 이 같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SF의 태동부터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작 관계자는 “범죄에 대한 의심만으로 고문을 가하고 정부가 시민들을 감시하는 일이 일상이던 시대에 대한 비판을 작품에 담은 문윤성 작가의 현실 감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