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가족 만남 힘든 시기 명절 행사도 시류 맞게 보완해야 퇴계 선생도 유연하게 치른 제사 겉치레보다 진정한 가족애 실천하자
김병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코로나19는 우리네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피붙이 가족이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효도와 우애로 대표되는 가족 사랑을 제일 앞세웠다. 핵가족 시대에 와서도 명절이나 가족 기념일이면 어김없이 모여 혈연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니 지난 추석과 연말연초에 이어 이번 설날에도 자녀를 만나지 못하는 부모들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이를 두고 자식들은 행여나 ‘편하게 잘되었다’는 생각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모형제의 가족애가 더 끈끈해지는 길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먼저, 그 길은 나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이끈다. 우리는 과거보다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훨씬 더 누리고 있으나 행복지수는 뒷걸음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자살률이 무엇보다 이를 증명한다. 조지 베일런트 하버드대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이기심과 물질적 잣대로 가족 간에 서로 다투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행복의 첫발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 사이에 효도와 우애, 공경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효도해야 하는 이치는 너무나 뚜렷하다. 무엇보다 효도는 낳고 길러준 분의 큰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힘없고 쇠약해진 부모를 보살피는 것은 윤리적인 면에서나 사회정의 면에서 당연한 이치이다. 효도는 또한 나 아닌 타인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북돋아 자신을 존경받는 사람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존경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영향을 미쳐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홀대받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득만 있고 실은 없는 순선(純善)의 행위이고, 그것이 효도이다.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는 자연히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공경으로 옮겨진다. 조상들은 제사와 차례의 형식보다 그 의미에 더 방점을 두었다. 돌아가신 분과의 그리운 만남이 그것이다. 살아계실 때 보살펴 주신 분을 돌아가셨다고 마음을 거두어야 할까? 도리나 인정상으로 그럴 수는 없다. 같은 조상의 피를 나눈 자손들의 형제애가 더 돈독해지고, 이러한 효도와 우애의 모습을 보고 배우는 자녀들의 인성이 바르게 되는 것도 제사와 차례가 지니는 참교육적 기능이다.
그러니 형식 때문에 의미를 외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형식은 시류에 맞추어 보완하고 개선하면 된다. 퇴계 선생도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비대면으로 간소하게 제사를 치렀고, 상제례 또한 옛 제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형편대로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남이 아닌 선생은 큰댁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제삿날에 축문과 밥과 국을 차리지 않고, 지방을 갖추고 떡과 면만 차려 제사를 지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올 설에는 이마저 어렵게 되었다. 이럴 때는 비대면 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지난달 퇴계 선생 450주기 제사 때 최소 인원만 종가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그러지 못한 수십 명은 온라인 화상 프로그램 줌(ZOOM)으로 참여했다. 시대에 부응하여 종갓집 제사의 비대면 시대를 연 것이다. 지혜를 모으면 시대에 부합하는 좋은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설 명절에 만나지 못했다면 코로나가 물러난 이후 두 번 세 번 더 찾아뵈면 된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마음과 의지인 것이다. 이번 명절이 진정한 가족애와 효도를 다시 생각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