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취재 그 후]
임우선 히어로콘텐츠팀장
▶환생-첫 번째 이야기 ‘내 동생 현승이’
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1/story1
환생 1화를 통해 소개된 손봉수·현승 형제의 사연을 따라갔던 첫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달여의 사전취재를 거쳐 히어로팀의 보도주제를 장기기증으로 최종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날이었다. 취재 협조를 요청해뒀던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코다)에서 급히 전화가 왔다. “기증의 모든 과정에 대해 취재를 허락한 기증 유가족이 있다. 이런 경우는 10년 만이다. 바로 부산으로 갈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사실 정식 현장취재에 들어가기 전 진행했던 여러 사전 인터뷰에서 대부분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보도 취지는 좋은데 과연 취재가 될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내의 장기기증 발생 자체가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다 설령 기증이 이뤄지더라도 유족들이 언론 취재에 전면 동의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취재팀의 절반이 부산에서 현승 씨의 이별을 취재하는 동안, 나머지 기자들은 서울의 곳곳에 흩어져 이식대기자 선정 과정과 이식수술 준비 과정, 수혜자 인터뷰를 동시에 진행했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절박한 현장을 취재해 연결하고, 장기와 의료진을 따라 뛰고 또 뛰면서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보내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벽까지 전력을 다해 달리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3화(환생-세 번째 이야기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3)에서 보도했던 심장이식 수혜자 고영희 씨의 말처럼 “삶과 죽음은 비닐막 한 장 차이”였다.
현승 씨가 떠나고 한달 여가 돼 가던 때 다시 부산에 갔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현승 씨 묘소에 비석이 세워지는 날이었다. 이름 없던 묘에 손현승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힌 돌덩이가 올려지자 어머니는 다시 현승 씨를 수술실 앞에서 떠나보냈던 그날로 돌아갔다. “현승아, 니가 왜 여기에 있노. 내 아들 현승아….” 덤덤한 표정으로 비석을 세우는 인부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그 때 그날처럼 펄펄 뛰며 오열했다.
훈훈한 소식도 많았다. 환생 5화에서 보도한 조귀금 씨는 기사가 나가고 얼마 뒤 취재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남편의 장기를 기증한 귀금 씨는 현재 서울 북부지검에서 환경미화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귀금 씨는 “기사를 우연히 보신 북부지검장님이 직접 연락하셔서 ‘어떻게 이렇게 어렵고 숭고한 결정을 하셨느냐, 지검 내 여러 직원들에게 이 기사를 공유하며 함께 읽었고 감동을 나눴다’며 따뜻한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고 했다. 또 “주변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위로와 귀한 사랑을 받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그때 기증을 결정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고 했다.
환생을 취재하는 100일 동안 취재팀은 현승 씨 외에도 여러 기증자의 이별을 마주했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한 이별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지난 12월 10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심장, 폐, 간 등을 환생의 씨앗으로 남긴 정수아 양이다. 수아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수아의 기증이 어린 수아의 소망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아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질병을 갖고 태어나 큰 수술을 여러 차례 받고 서울아산병원 소아병동에 자주 오랜 기간 입원해 있었다. 수아 부모님은 그 곳에서 장기이식을 받지 못해 세상과 작별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고 한다. 수아 아버지는 “그래서 나라도 장기이식을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몇 년 전 기증 후 유족들에게 시신을 가져가라고 홀대했다는 보도를 보고 마음을 접은 터였다”고 말했다.
수아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너는 몸이 아파서 못해’라고 했더니 수아가 아쉬워했어요. ‘나도 저렇게 좋은 일 하면 좋은데….’라고 말하면서.”
그 일이 있고 반년 쯤 지난 작년 11월, 수아 아버지는 회사에서 울면서 걸려온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애가 이상하다. 표정이나 이런 게 수아가 아닌 것 같다. 이상하다. 느낌이 안 좋다는 전화였어요.”
회사에서 뛰쳐나온 아버지는 수아를 태우고 집이 있는 충북 충주에서 서울아산병원까지 달렸다. 아침, 점심 잘 먹고, 아침에 출근할 때 웃으며 인사한 수아가 낮잠 한숨 자고난 뒤 그렇게 됐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늘 그랬듯 ‘별일 없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수아가 깨어나지 못했다.
“암모니아 수치가 너무 높아 투석을 했는데 하루가 지나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동공반사도 없고, 통증반응도 없고…. 의사선생님께 여쭤보니 뇌가 손상된 것 같다고….”
수아가 중환자실로 들어간 뒤 부모님은 수아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심각해지면서 중환자실 면회가 일절 금지됐기 때문이었다. 실제 취재과정에서 너무나 가슴 아팠던 것은 코로나19로 일반 중환자실은 물론 소아중환자실이나 신생아중환자실까지 대형 병원의 모든 면회가 전면 금지됐던 점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픈 자식의 손조차 잡아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 곳 저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아 부모님은 열흘 가까이 낮에는 중환자실 앞을 서성이다 밤에는 지하주차장에서 쪽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아가 했던 ‘천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주차장에서 아내에게 기증 얘기를 꺼냈어요. 아내는 ‘아직은 그런 거 판단하지 말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저녁 아내가 울면서 그러더군요. 수아가 다른 사람 살리고 몸의 일부라도 다른 사람에게 가서 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살아 있겠지란 생각이 들 것 같다고.”
그렇게 수아는 뇌파검사를 받고, 뇌사판정위원회에서 뇌사판정을 받은 뒤 기증할 수 있는 장기들을 선물하고 하늘로 떠났다. “예전에 봤던 기증인 홀대 기사가 마음 쓰였는데 막상 해보니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과는 반대였어요. 어린아이인데도 장례 절차 밟을 때 존칭 써주시고, 옮길 때도 세심하게 해주셨고요. 의료진들도 ‘예쁜 딸 두고 이런 결정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함께 울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들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함께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어요.”
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얘길 들은 동생의 첫마디는 “이제 언니 하늘나라 가면 안 아파?”였다. 몸이 아플 때도 항상 동생과 놀아주던, 여러 꿈 가운데 마지막 꿈은 ‘아기들 고쳐주는 소아과 의사’였던 수아의 이야기를 많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수아 아버지의 소망처럼, 아픈 몸 때문에 평범한 애들처럼 실컷 놀지 못했던 수아가 하늘에서는 낚시도 가고, 수영장도 가고, 여행도 다니며 신나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 환생-두 번째 이야기 ‘다시 만난 너’
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2
환생 2화를 통해 보도한 고홍준 군은 사전취재 단계부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떠오르던 아이였다. 취재팀은 장기기증 기획을 준비하며 최근 5년간 언론에 보도됐던 모든 기증 사례를 확인했다. 그 가운데 유독 홍준이의 기증 사실이 담긴 짧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자이기 이전에 엄마로서, 해맑게 웃는 홍준이 사진을 보며 ‘엄마라면, 아빠라면 홍준이의 기증 이후 소식이 얼마나 그리울까. 만약 홍준이의 일부가 어디선가 잘 지낸다는 걸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하는 생각을 했다.
장기기증 관련 제도를 파악하던 중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장기이식법)’에 일종의 예외조항이 있음을 확인했다. 장기이식법은 장기기증인 유족과 이식 수혜자가 서로를 알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공익적 목적이고 양 당사자가 동의할 경우 제한적 정보 제공을 허용하고 있었다.
사실 기증자 유가족과 이식 수혜자의 상호 정보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어떤 형태로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수혜 아동을 확인하는 과정이 무척 어려울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설령 관련 정보를 얻어 연락을 취한다 하더라도 수혜아동 부모님이 취재에 선뜻 응해 주실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식수혜자들의 경우 ‘이식인’이란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고 취업 등 사회생활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보니 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홍준이 부모님을, 더 나아가 홍준이 부모님과 같은 처지의 기증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수혜아동의 소식을 꼭 확인해 전하고 싶었다. 홍준이 아버지와 취재팀의 첫 인터뷰에서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진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워딩이 있었다. 기사에도 담겼던 이 부분이다. “그냥 건강한지만이라도 알고 싶지요. 이름도 사는 곳도 몰라도 됩니다.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초등학생인지만이라도. 그냥 우리 애 생각이 날 때마다, 홍준이의 일부를 지닌 아이라도 떠올려보고 싶어요. ‘내년엔 중학교에 가겠구나’ ‘올해 수능을 보겠네’ ‘아이고 이제 군대에 갔겠구나’. 그냥 우리 아이 커가는 것처럼···. 솔직히 욕심을 부리면, 한 번만 보고 싶죠. 한 번만 안아보고 싶죠. 그저 바람일 뿐이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으니까, 진심을 다하면 통하리라 믿고 수혜자 정보를 가진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KONOS·코노스)과 코다에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거듭된 논의 끝에 수혜자 취재는 해당 수혜자 부모님이 동의할 경우에만 진행하며 보도는 익명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 하에 마침내 심장을 받은 현우(가명)와 신장을 받은 민준이(가명) 부모님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사실 현우와 민준이 부모님으로서는 취재라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우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쉽지 않은 취재에 응해주시고 요청 드린 심전도 그래프와 심장 초음파까지 전해주신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말씀을 드린다. 남들에게는 그래프 종이 한 장, 흑백의 초음파 영상 하나일지 모르지만 홍준이 부모님은 그 안에서 홍준이를 보셨으리라 생각한다. 다른 많은 기증 유가족들 역시 홍준이와 현우, 민준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가족을 다시 만난 느낌을 받으셨길 바래본다.
보도가 나간 뒤 홍준이 아버지는 취재팀에 홍준이의 생전 예쁜 모습들을 여럿 보내주셨다.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사진들이다. 홍준이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초등학교에 간 이후까지…. 그 중 바다에서 낚시하는 사진은 홍준이가 쓰러지기 3일 전 모습이라고 했다. 모든 장면에서 홍준이는 밝고 행복해보였다. 비록 홍준이는 이 세상에 짧게 머물다 갔지만 많은 사랑을 받고 떠났다 여겨졌다.
환생을 취재한 100일은 당연한 듯 여겨지는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후회 없는 인생이 되려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나눠야 함을 새삼 깨닫는 기회였다. 좀처럼 사는 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요즘,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문득 환생의 위로가 떠오를 수 있다면 큰 보람일 것이다. 기증인과 기증인 유가족, 이식수혜자와 이식대기자, 코디네이터와 의료진, 그리고 이들을 응원해준 모든 독자와 우리 사회의 숨은 히어로들에게 환생을 바친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취재하는 과정에서, 또 보도가 나간 뒤 주변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히어로콘텐츠팀(히어로팀)이 대체 뭐냐’, ‘왜 장기기증을 보도주제로 선정했냐’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히어로팀은 지난해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일종의 프로젝트팀이다. 히어로팀은 각 부서에서 차출된 4~5명의 소수정예 기자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히어로팀에 소속되는 즉시 현업부서를 떠나 오직 히어로팀 보도 주제만을 취재하게 된다. 보도주제 선정이나 취재기한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다. 기자들로서는 평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건 상 심도 있는 장기취재가 불가능했던 보도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히어로콘텐츠는 이 같은 취재기자 외에도 전담 사진기자, 일러스트·그래픽 등을 맡을 뉴스디자인 담당 기자, 별도 사이트 구축을 위한 기획 기자 및 디지털 전문가, 신문 레이아웃을 위한 전담 편집기자가 함께 협업해 만들어진다.
처음 팀이 결성됐을 때 가장 중요했던 건 역시나 보도주제 선정이었다. 취재팀장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는 것, 또 하나는 히어로팀이어야만 가능한 보도주제를 정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짧은 기간 안에 취재가 가능하다거나 모두가 관심을 갖고 보도하는 현안이라면 굳이 히어로팀이 아니어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명의 기자가 △동시에 움직이며 △장기간의 깊이 있는 취재를 할 수 있는 만큼 이 소중한 기회를 헛되지 않게 할 보도주제를 선정하려 고심했다.
팀 내에서 다양한 주제가 나왔다. 모두 중요하고 가치 있었다. 그러나 3주 간의 열띤 회의와 토론, 기초 취재 끝에 우리는 장기기증을 최종 보도주제로 선정했다.
애초에 기사를 통해 ‘장기기증을 해야한다’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다. 다만, 날이 갈수록 사는 게 힘들고, 외롭고, 각박하게 느껴지는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을 때조차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나눈 사람들의 숭고함을 알리고 싶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만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순 없다. 아무리 낙심한 상황이더라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만큼 애끊는 순간은 없다. 그 모든 어려움이 더해진 상황에서조차 남을 위해 나누는 결정을 한 사람들.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는 아직 살만한 곳임을,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기댈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