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120만 개가 출하를 앞두고 있습니다. 선별 검사라도 해서 팔게 해달라고 (정부에)매달리고 있지만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 속상하네요.”
김상보 산안마을 영농조합법인 대표(63)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미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잠복기(최대 3주)가 끝나 감염 위험이 없는 상황인데 살아있는 닭을 죽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정부의 강제적 살처분을 비판했다.
방역당국이 AI 발생 농장에서 1.6㎞나 떨어진 산안마을농장의 가금류를 살처분을 하는 것은 2018년 확진농가 반경 500m로 제한됐던 예방적 살처분 기준이 3㎞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AI 긴급행동지침(SOP)상 전파력과 농장 형태, 지형적 여건 등에 따라 범위와 시행 여부를 조정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무차별적인 예방적 살처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농장은 살처분 명령을 거부하고 행정심판을 제기했고, 지난달 25일 경기도 행정심판위원회 결정에 따라 강제적 살처분 집행이 유예됐다. 김 대표는 “살처분 명령 이후 농장 측에서 실시한 정밀검사와 매일 한 차례의 간이 키트 검사에서 ‘음성’ 반응이 나왔다”며 “강제적 살처분이 잠시 유예됐지만 이마저도 언제 진행될지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 뿐”이라고 토로했다.
빠른 속도로 살처분 규모가 늘자 업계에서는 ‘과잉 살처분’ 논란이 일고 있다. 전국 광역지자체 중 AI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경기도의 경우, 닭과 오리 등 살처분이 진행된 농장 161곳(1415만여 마리) 가운데 발생 지점과 3㎞ 정도 인접했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된 농장만 128곳(918만여 마리)이다. AI 발생 농가 33곳에서 살처분 된 497만여 마리보다 420만 마리 이상 많다.
충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음성군의 경우 발생 농장 5곳을 포함한 반경 3㎞ 안에 19곳의 농장들도 예외없이 예방적 살처분을 진행했다. 가금류 235만9000마리가 강제 살처분된 것이다. 박열희 음성군 양계협회장은 “수평전파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올해 AI 전파 양상은 수직전파가 대부분인데도 살처분은 수평전파가 심할 때처럼 했다”라고 말했다.
방역 일선에서는 고병원성 AI 감염원을 찾는데 애를 먹고 있다. 지역에서 처음 확진판정을 받은 경북 상주시 공성면 농장의 경우 최신식 무창(無窓) 형태로 사육장 안에 창문이 없고 내부 환기 시스템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고병원성 AI의 주요 감염원인 철새가 침입할 수 없는 구조다. 지은지 3년 밖에 되지 않아 위생상태도 좋았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병원성 AI가 발생해 이 농장 산란계 18만8000여 마리와 3㎞ 안 4곳의 농가 육계 메추리 등 모두 55만9000여 마리가 살처분 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역대 최대 피해였던 2016~2017년 AI 유행사태를 겪고도 형식적인 대책만 세우는 등 방역에 안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 소속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농식품부의 신년업무계획 중 AI 방역 계획은 2015년 농식품부 연구용역보고서 ‘AI 방역체계 개선방안 후속대책연구’ 내용을 그대로 반복했다.
2015년 당시 보고서는 △가축 질병 발생 위험이 높은 지역을 중점방역관리지구로 지정 △농경지를 이용한 비닐하우스 형태가 대다수인 국내 오리농장의 경우 차단방역 대책 마련 등을 다뤘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AI 유행 와중 농식품부가 발표한 신년업무계획에도 똑같은 내용만 기재했다.
화성=이경진 기자 lkj@donga.com
상주=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음성=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