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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민족적 단결’ 높이 외친 동아일보에 날아든 돌팔매

입력 | 2021-02-16 11:40:00

1924년 01월 29일




플래시백
 1924년 벽두인 1월 2일자부터 동아일보 1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이 5회 연속 실렸습니다. 이광수가 집필한 이 기획 사설은 ‘우리는 무슨 방법이든지 조선 안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운동을 하도록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0만 명에 이르는 민족으로 아무런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는 민족은 동서고금에 없다고 하면서요. 훈련하고 단결해서 하루 빨리 민족의 정치적 중심세력을 만들어 앞날에 대비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산업과 교육 분야의 3대 조직은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을 찾는 일이고 백년을 내다보는 삼위일체라고 강조한 것이죠.


그런데 2회분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원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라는 구절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는 총독부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조직을 만드는 ‘자치제’라는 비판이 날아든 것이었죠. 북성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이 ‘동아일보=자치’ 딱지를 붙이며 공격에 앞장섰습니다. 이들은 동아일보와 총독부가 손잡고 이런 주장을 했다고까지 비난했습니다. 무산자혁명을 내세운 사회주의 세력은 동아일보를 유산계급의 대표신문으로 지목해 틈만 나면 목소리 높여 비판했죠. 1922년 1월 운양 김윤식 장례 때도 사회장으로 모시자는 동아일보의 제안을 불매운동까지 들먹이며 반대했습니다.(2020년 8월 22일자 ‘친일? 항일! 사회장 찬성? 반대! 운명한지 2주 만에…’ 참조)

동아일보의 정치조직 제안은 평지돌출 식으로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1922년 1월 1일부터 ‘현대정치요의’를 22회 연재하면서 ‘국체와 정체’ ‘전제정치와 입헌정치’ ‘삼권의 분립과 민권의 신장’ 등의 정치이론을 하나하나 짚었죠. 더불어 ‘정치적 자유’도 강도 높게 요구했죠. 자유가 없으면 문화정치가 무단정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면서요. 이런 준비 끝에 이해 7월 마침내 정치적 중심세력 개념을 내놓습니다. 사회주의 같은 이념이 아니라 민족을 중심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수백만 명이 참여해야 하는 거대한 구상이었고 상하이에 있을 때 흥사단에 가입했던 이광수를 매개로 안창호의 민족운동노선과도 맥이 닿아 있었습니다. 정치적 실력양성운동이라고 할까요.


정치조직은 실제로 첫걸음을 내딛기까지 했습니다. ‘인촌 김성수전’에 1923년 12월 김성수 송진우 최원순 신석우 안재홍 최린 이종린 이승훈 조만식 서상일 등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조직문제를 협의했다고 나옵니다. ‘연정회’의 출발이었죠. 일제 기록에는 1924년 1월 중순에 만났다고 나와 시점은 좀 다릅니다. 어쨌든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의 힘이 빠진 시점에 민족주의자들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모임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대적인 산업결사와 교육결사를 통해 두 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의도도 있었겠죠. 하지만 자치 논란이 거세지면서 연정회는 더 이상 구체화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29일자 사설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는 만약 오해를 불렀다면 ‘표현이 서투르고 논리가 불철저했’기 때문이라며 이해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자치’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써서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었죠. ‘자치 반대’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유는 정치운동의 미묘함을 감안했던 고심의 결과로 보입니다. 독립을 최종 목표로 향해 나아가다 보면 중간 어디쯤에선가 있을지도 모를 합법적 정치활동을 마냥 외면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겠죠. 단순히 자치를 목표로 삼지 않았기에 1922년 일각에서 내정독립론이 제기됐을 때 동아일보는 사설 ‘내정독립도 독립인가’를 통해 가차 없이 비판했습니다. 내정독립은 진정한 독립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죠.

이진기자 leej@donga.com


원문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와 運動(운동)』에 對(대)하야

一(1)
우리는 去(거) 一月(1월) 三日(3일)에 『民族的(민족적) 經綸(경륜)』이라는 題下(제하)에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와 運動(운동)』이라는 一篇(일편)의 論文(논문)을 草(초)하엿노라. 그러나 이 論文(논문)의 趣旨(취지)가 現在(현재) 吾人(오인)의 立地(입지)에 잇서々 그 理論(이론)이 徹底(철저)치 못한 것도 事實(사실)이며 또한 그 論文(논문) 自體(자체)의 結論(결론)을 吟味(음미)치 아니하면 意外(의외)의 疑点(의점)을 招致(초치)할 念慮(염려)도 不無(불무)하다. 그럼으로 更(경)히 一篇(일편)의 文(문)을 草(초)하야 讀者(독자)의 煩讀(번독)을 謝(사)코저 하노라.

二(2)
勿論(물론) 우리 民族(민족)의 政治的(정치적) 最高(최고) 理想(이상)은 炳若日星(병야일성)하게 民族(민족) 自體(자체)의 決定(결정)으로부터 解決(해결)될 것은 確然(확연)한 事實(사실)이다. 一個人(일개인) 或(혹)은 數個(수개)의 團體(단체)의 行動(행동)으로 因(인)하야 左右(좌우)될 것도 아니며 또한 時勢(시세)의 變遷(변천)에 隨(수)하야 動搖(동요)될 것도 아니다. 이 点(점)에 잇서々는 二千萬兄弟(2천만형제)와 가치 共通(공통) 確認(확인)하는 바라. 苟(구)히 贅說(췌설)할 必要(필요)가 업스며 또한 一毫(일호)의 疑(의)를 揷(삽)할 必要(필요)도 업다. 그러나 吾人(오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政治的(정치적) 最高(최고) 理想(이상)을 解決(해결)하는 方法(방법)으로는 무엇보다도 民族的(민족적) 團結(단결)을 鞏固(공고)히 하야써 至今(지금)부터 當面(당면)의 權利(권리)와 利益(이익)을 增進(증진)케 할 必要(필요)가 有(유)치 아니할가.

三(3)
例(예)컨대 우리 民族(민족)의 生命(생명)의 源泉(원천)이 될 만한 民立大學(민립대학)의 運動(운동)이라든지 또한 經濟的(경제적) 破滅(파멸)을 救急(구급)하는 物産?勵(물산장려)의 運動(운동)이라든지 우리 自體(자체)의 團結力(단결력)으로써 完成(완성)케 하며 發展(발전)케 하는 것이 現下(현하) 朝鮮內(조선내)에 잇는 兄弟(형제)의 責務(책무)가 아닐가. 그러나 이러한 運動(운동)을 統一的(통일적)으로 또한 組織的(조직적)으로 하자 하면 自然(자연)히 民族的(민족적)으로 一大(일대) 團結(단결)을 要(요)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며 또한 一大(일대) 機關(기관)을 設立(설립)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在來(재래)의 이러한 團結(단결)과 機關(기관)이 缺乏(결핍)하엿슴으로 民立大學(민립대학)의 運動(운동)이나 物産?勵運動(물산장려운동)이 系統的(계통적)으로 徹底(철저)하게 發展(발전)치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社會的(사회적) 方面(방면)으로 觀察(관찰)하여도 一定(일정)한 統制力(통제력)이 업슴으로 猜疑(시의)가 生(생)하며 分裂(분열)이 起(기)하야 風紀(풍기)가 날로 衰頹(쇠퇴)하여 가며 民德(민덕)이 날로 腐敗(부패)하여 가는 것이 目下(목하) 慘狀(참상)이 아닌가. 그 誰(수)가 此(차)를 否認(부인)하랴.

四(4)
그러면 이 모든 問題(문제)를 解決(해결)하는 點(점)에서 民族的(민족적) 團結(단결)을 絶呌(절규)하는데 不過(불과)하엿다. 要(요)컨대 問題(문제)는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라는 意味(의미)에 잇서서 疑問(의문)의 焦點(초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生存權(생존권)을 統一的(통일적)으로 系統的(계통적)으로 保障(보장)하며 擴張(확장)하는 데는 이것을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라 하여도 何關(하관)이 잇스랴. 이것은 現代(현대)의 生活(생활)을 離(이)하야 政治(정치)가 업스며 또한 政治(정치)를 離(이)하야 生活(생활)을 向上(향상)할 수 업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의 主張(주장)은 이러한 모든 生活運動(생활운동)은 民族(민족) 自體(자체)의 團結力(단결력)으로써 向上(향상) 發展(발전)케 하라 함이다. 民族的(민족적)으로 團結(단결)을 作(작)하고 團體(단체)의 力(역)으로 우리의 經濟(경제)와 밋 敎育問題(교육문제)를 發展(발전) 向上(향상)케 하는 것이 이 곳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가 아닌가.

五(5)
이러한 意味(의미)에 잇서서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와 運動(운동)』을 提唱(제창)하는데 不過(불과)하엿다. 그럼으로 當初(당초)부터 主權組織(주권조직)의 政治的(정치적) 方面(방면)에는 言及(언급)치 아니하엿슬 뿐 아니라 設令(설령) 우리의 最高(최고)한 政治的(정치적) 理想(이상)이 잇다 할지라도 이것은 到底(도저)히 論議(논의)할 自由(자유)가 업는 것을 熟考(숙고)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다만 文化的(문화적) 方面(방면)으로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를 云々(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原因(원인)이 潛在(잠재)한 까닭이다. 萬一(만일) 吾人(오인)의 提唱(제창)하는 『政治的(정치적) 結社(결사)와 運動(운동)』이라는 論旨(논지)를 一人(일인)이라도 다른 意味(의미)로 誤解(오해)한다 하면 이는 그 責(책)이 修辭(수사)의 拙(졸)에 잇슬찌언뎡 決(결)코 論文(논문)의 主旨(주지)가 아닌 것을 玆(자)에 一言(일언)하며 그래도 그 論法(논법)이 不徹底(불철저)함으로 一般(일반) 思想界(사상계)의 誤解(오해)를 惹起(야기)할 點(점)이 잇다 하면 吾人(오인)은 決(결)코 이에 對(대)한 陳謝(진사)를 躊躇(주저)치 아니하노라. 따라서 그동안 直接間接(직접간접)으로 批評(비평)과 質疑(질의)를 加(가)하여 주신 諸氏(제씨)의 憂國慨世(우국개세)의 誠衷(성충)을 感謝(감사)하야 마지아니하노라.


현대문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

1.
우리는 지난 1월 3일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이라는 한 편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 논설의 취지가 현재 우리의 입지에 있어서 그 이론이 철저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며 또한 그 논설 자체의 결론을 음미하지 않으면 의외로 의문을 불러올 염려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다시 한 편의 글을 쓰니 독자들이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2.
물론 우리 민족의 정치적 최고 이상은 민족 자결로 해결될 것은 밝은 해와 별처럼 확실한 사실이다. 한 개인 또는 몇 개 단체의 행동으로 인해 좌우될 일도 아니고 또한 시세의 변화에 따라 동요될 일도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2000만 형제와 같이 공통으로 확인하는 바이다. 구차하게 군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한 점의 의문을 끼워 넣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정치적 최고 이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단결을 굳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당면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의 생명의 원천이 될 만한 민립대학의 운동이라든지 또한 경제적 파멸의 위기에서 구하는 물산장려운동이라든지 우리 자체의 단결력으로써 완성하게 하며 발전하게 하는 것이 현재 조선 안에 있는 형제의 책무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운동을 통일적으로 또한 조직적으로 하려 하면 자연히 민족적으로 일대 단결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또한 일대 기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전부터 이러한 단결과 기관이 없었으므로 민립대학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이 계통적으로 철저하게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방면으로 보아도 일정한 통제력이 없음으로 시기심이 생기며 분열이 일어나 질서가 날로 쇠퇴해 가며 도덕이 날로 부패해 가는 것이 현재의 참상이 아닌가. 그 누가 이를 부인할까.

4.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점에서 민족적 단결을 외치는데 불과했다. 요약하면 문제는 ‘정치적 결사’라는 의미에 의문이 모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권을 통일적으로 계통적으로 보장하며 확장한다고 하면 이것을 정치적 결사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은 현대의 생활을 떠나서 정치가 없으며 또한 정치를 떠나서 생활을 향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이러한 모든 생활운동은 민족 자체의 단결력으로써 향상 발전하게 할 의도였다. 민족적으로 단결을 이루고 단체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와 교육문제를 발전 향상하게 하는 것이 곧 정치적 결사가 아닌가.

5.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을 제창한데 불과했다. 그러므로 당초부터 정치적 방면의 주권조직은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우리의 최고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도저히 논의할 자유가 없다는 상황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문화적 방면으로 정치적 결사를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원인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제창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이라는 논지를 한 사람이라도 다른 뜻으로 오해한다고 하면 그 책임은 표현이 서툴렀기 때문일지언정 결콘 논설의 주지가 아닌 것을 여기서 밝히며 그래도 그 논리가 불철저해 일반 사상계의 오해를 불러올 점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에 대한 사과를 주저하지 않겠다. 따라서 그동안 직접 간접으로 비평과 질문을 해주신 여러분의 걱정과 개탄을 감사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