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지금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백악관의 전화 한 통. “○○ 나라 대사로 당신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해외 주재 미국대사 제안 전화입니다. 이 전화를 받기 위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험에도 불구하고 지지 집회에 “바이든”을 외치고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몇 다발씩 꺼내 기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최근 미국 언론에 따르면 기대만큼 빨리 대사직 오퍼가 오지 않고 있다고 하네요. 기다리다가 지친 이들의 입에서 욕이 나올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도와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대통령이 되니까 모른 척하네. 이렇게 괘씸할 수가….”
지난 대선 유세 때 실리콘밸리의 한 기업가가 마련한 정치자금 후원 모임에서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후원 모임은 주최자 집 거실이나 수영장 등에서 파티 형식으로 열린다. 새너제이머큐리뉴스
물론 대사직 제안을 받는 이들은 평범한 미국인들이 아닙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치 경제계의 거물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사직이 탐나는 것입니다. 외교 일선에서 활동하며 세계평화를 위해 힘쓴다는 것은 그들에게 최고의 영예입니다.
지금 워싱턴에서는 몇몇 후보 이름만 떠도는 정도입니다. ‘바이든빅토리펀드’에 10만 달러 이상을 후원한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은 주중 미국대사 유력 후보로 오르고 있습니다. HBO 중역 출신인 제임스 코스토스 전 스페인 주재 미국대사는 주영 대사로 거론되고 있죠. 그는 지난 대선 때 8만5000달러 이상을 바이든 진영에 기부했습니다. 데니스 바우어 전 벨기에 주재 미국대사는 주프랑스 대사로 유력합니다. 그녀 역시 바이든 자금 모집의 ‘큰 손’으로 불립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주중 미국대사로 거론되는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왼쪽)이 2016년 상하이 디즈니랜드 개막 때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오른쪽)을 만났다. 친중파인 아이거 회장은 양국 기업들의 협의체인 미중무역전국위원회(USCBC)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미 중국대사관 홈페이지
원칙적으로 보자면 국무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대사 적임자겠죠. 차관보, 부차관보, 담당국장 등 고위직까지 올라온 외교관들은 대사로 나가기 위해 젊은 날 하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밤낮없이 일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또 이들만큼 해당 국가 이슈들을 꿰뚫고 있는 전문가도 없지요. 국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대사들을 ‘직업(커리어) 대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요즘 대세는 국무부 관리 보다는 정치 경제계 인사들이 대사로 직행하는 경우입니다. 정치자금 거액 기부자나 전 현직 유명 정치인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된 것이죠. ‘정치 대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죠.
미국에게는 당연히 주중 대사가 가장 중요합니다. 대사는 해당국이 임명해서 보내는 절차를 밟지만 중국 정도 되면 사전에 “이 후보가 괜찮은가”하고 의사를 타진합니다. 중국은 철저히 “‘빅 네임’을 원한다”는 의사를 미국에 전달한다고 합니다. 직업 대사보다는 무역 갈등이 빚어질 때 미 정치권에서 통할 수 있는 정치인 출신 대사를 선호하는 것이지요. 존 헌츠먼 전 유타 주지사, 게리 로크 전 워싱턴 주지사, 맥스 보커스 전 상원의원 등 주중대사를 역임한 이들을 보면 대개 그런 성향입니다. 최근 아이거 디즈니 회장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그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임명될 경우 중국에 대한 화해 제스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주일 미국대사(2013~17년) 시절 셀러브리티급 환대를 받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장녀 캐럴라인 케네디 변호사(오른쪽). 대사 시절 뉴욕을 잠시 방문했을 때 아시아소사이어티 주최 일본 관련 행사에 기모노를 입고 등장해 일본인들을 기쁘게 했다.아시아소사이어티
일본 역시 유명인 대사를 선호합니다.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토머스 폴리 전 하원의장 등을 거쳐 외교경력이 없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 변호사가 주일 대사를 지낸 것을 보면 일본의 취향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한국은 아직 직업 대사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로 오는 분들 이력서를 보면 국무부 국방부 근무 경력으로 꽉 차있지요. 정치 대사가 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빅뉴스’가 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국무부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한 미대사만큼은 북한 문제를 다뤄본 경력자가 우대받습니다.
정치 대사는 트럼프 시대에 크게 늘었습니다. 직업 대사와 정치 대사의 비율은 역사적으로 7대 3 정도를 유지했던 것이 트럼프 행정부 때 5.5대 4.5로 바뀌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치자금 후원자들에게 대사 자리를 선심 쓰듯 내줬기 때문이죠. 그 가운데는 자질 부족 논란을 일으킨 대사들도 꽤 많았습니다.
켈리 크래프트 전 캐나다 주재 미국대사(왼쪽)가 캐나다 의회를 방문해 저스틴 트리도 총리(오른쪽)와 만났을 때 모습. 남편이 미 굴지의 석탄재벌인 그녀는 대사 임기(2017~19년) 동안 자주 자리를 비워 논란이 됐다.캐나다 총리실 홈페이지
피부과 의사 출신 제프리 로스 군터 아이슬란드 주재 미대사는 경호강박증 때문에 요새 같은 사저를 짓는가 하면 치안 우수 국가인 아이슬란드에 난데없이 총기 소지 권리를 요구해 외교 논란으로 비화됐습니다. 존슨앤존슨 창업자의 증손자인 우디 존슨 주영 대사는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국무부 조사를 받기도 했죠. 석탄재벌 며느리 출신인 켈리 크래프트 캐나다 주재 미대사는 부임지인 오타와에서 임기의 절반 밖에는 지내지 않고 시댁이 있는 켄터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시대의 대사들이 남긴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격을 갖춘 외교 관리는 많다”며 “정치자금을 많이 후원했다고 해서 (대사로)임명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기록적인 정치자금 후원과 민주당 정치인들의 열렬한 지원 사격 덕분에 당선됐기 때문에 이들의 공로를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아직 대사 임명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명분과 실리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