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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비트코인 대박’ 전말[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입력 | 2021-02-18 03:00:00


미국 법무부 트레이시 윌키슨 연방검사가 2018년 9월 6일 북한 해커 박진혁을 연방수사국(FBI) 수배 명단에 올린 뒤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비트코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어느새 5만 달러를 넘었다. 비트코인을 장기 보유한 사람이라면 요즘 행복한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 중 한 명이 김정은이라면….

지금 북한은 몇 년째 이어지는 대북 제재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셀프 봉쇄까지 1년째 겹쳐 돈을 벌 곳이 없다. 북한은 무역의 95%를 중국에 의존하는데 지난해 대중(對中) 수출액은 4800만 달러(약 530억 원)에 그쳤다. 특히 연말로 갈수록 수출 규모는 급격히 줄어 지난해 12월 수출액은 겨우 162만 달러(약 18억 원) 정도였다. 명색이 국가인데 이 정도 무역액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다. 지난해 태풍 피해를 본 지역에 수천 채의 집을 건설했고,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엔 신형 무기와 군복도 등장시켰다. 돈이 없어 헉헉대야 마땅할 것 같은데도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달성하겠다며 새해 벽두부터 밀어붙인다. 거기에 더해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 전후로 약 1억 달러의 현금이 중국 단둥(丹東) 주재 북한영사관의 전용버스에 실려 북에 들어갔다는 내부 소식통의 제보도 들린다. 수출로 돈을 번 게 언제인데, 이런 거액은 도대체 언제 만든 것일까.

최근 대북 소식통으로부터 흥미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북한의 정보기술(IT) 인력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채굴장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2018년 9월 13일 미국 재무부는 북한 국적의 정성화(당시 48세)와 중국에 있는 북한 인력이 운영하는 IT업체인 옌볜실버스타, 그리고 이 회사의 러시아 소재 위장 기업인 볼라시스실버스타를 각각 제재 명단에 올렸다. 볼라시스실버스타가 1년 새 수십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는 것이 제재 이유였다.

그런데 미국이 밝힌 액수는 당시 북한 내부 소식통이 기자에게 제보했던 액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해외 파견 IT 인력에 대해 잘 아는 위치에 있던 소식통은 정성화가 중국에서 지휘하는 인원만 300여 명에 이르며 이들이 1년에 벌어 바치는 돈은 2000만 달러(약 220억 원)라고 증언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외화를 벌기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북한 IT 인력들이 해킹뿐 아니라 비트코인과 라이트코인, 모네로 등 암호화폐 채굴에도 뛰어들었다는 증언이었다.

중국 공장에 단체로 숙식하며 지내던, 1인당 상납금이 많지 않은 다른 북한 노동자들은 재작년 말 대다수 귀국했다. 그러나 정성화가 이끄는 ‘IT 외화벌이 전사’들은 미국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중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주민 거주 지역에 월세 집을 얻어 5명 안팎의 소규모 팀으로 상주하며 외출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적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루 16시간씩 꼬박 앉아 작업을 하다 보니 허리 디스크가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대를 당하지만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런 ‘IT 노예’들이 중국의 외진 지역들에서 최소 5년 이상 채굴장을 운영했다면 암호화폐를 얼마나 채굴했을까.

거기에 북한 해커에 의한 암호화폐 해킹 뉴스는 너무 많아 이제는 관심도 끌지 못할 지경이다. 2019년 8월 발간된 유엔 안보리 전문가패널 보고서에는 북한이 2015년 1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최소 17개국의 금융기관과 암호화폐 거래소를 대상으로 35차례의 사이버 공격을 진행해 최대 20억 달러어치를 탈취한 혐의가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 비트코인 평균 가격은 지금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으니 보고서의 20억 달러가 지금은 60억 달러가 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4월과 9월 900억 원어치가 사라진 한국 암호화폐 거래소 야피존과 코인이즈의 해킹 사건도 북한 해커 집단의 소행이라고 국가정보원은 밝혔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물론 요즘은 해킹만 됐다 하면 다 북한 소행이라고 하니 북한 해커들도 억울한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오랫동안 채굴과 해킹을 해왔다면 김정은이 상당히 많은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매년 훔쳐간 총액은 김정은이나 알겠지만, 비트코인 1만 개만 있어도 5억 달러나 된다.

요즘 김정은은 암호화폐 지갑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며 활짝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철저한 익명성과 급격한 가격 변동성에 의존한 암호화폐는 어쩌면 말라 죽어가는 북한을 좀비처럼 잠시 부활시켜주는 신문명(新文明)의 선물일 수도 있어 보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