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유럽 연초부터 폭설·홍수·한파 극한기후, 정치 이슈로 확대 탄소국경세 등 규제 논의 본격화 코로나 계기로 친환경 체질 개선
폭설로 프랑스 파리시가 온통 하얗게 변한 10일 한 모녀가 에펠탑 옆 샹드마르스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김윤종 파리 특파원
10일 오후 1시(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공원에서 만난 7구 주민 클로에 씨(37)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자녀를 연신 찍어댔다. 에펠탑 옆에 있는 이 공원에는 눈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렸다. 파리는 1년 중 10일가량 눈이 내리지만 눈이 쌓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날은 오전까지 내린 눈이 수북이 쌓였다. 한 시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문을 닫은 스키장의 ‘대안’이라며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스키 연습을 하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낭만과는 별개로 피해가 컸다. 전날부터 내린 눈과 영하 15도의 한파로 수도권 일드프랑스, 노르망디 등 북부 지역에서는 안전사고가 속출했다. 파리시는 노숙인들의 동사를 막기 위해 숙박 제공 계획을 시행했다. 15구 주민 에마 씨(42)는 “갈수록 기후 편차가 커져 내가 알던 그 파리 날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갈수록 심해지는 유럽 이상기후
프랑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연초부터 유럽 곳곳에서 ‘○○년 만의 폭설·홍수’라는 기상당국 발표가 끊이질 않았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는 지난달 9일 50cm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1971년 이후 50년 만의 최대 적설량이다.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역시 1, 2월에 곳곳에서 20cm 안팎의 폭설과 한파가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는 13일 140년 만의 최대치 폭설이 내렸다.
독일은 홍수가 발생해 라인강, 모젤강 등 주요 하천이 2일부터 범람해 곳곳이 침수됐다. 계속되는 한파로 14일 베를린 란트베어 운하가 얼어붙자 2000여 명이 몰려 얼음 위에서 댄스파티를 했고 이를 경찰이 해산시키는 해프닝이 있었다. 지역마다 ‘극한기후’가 나타난 배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온난화로 북극 상공의 차가운 공기 덩어리가 하강한 것이 공통 원인이라고 기상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 기후변화는 유럽 내 주요 정치 도구
3일 홍수 여파로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 인근 비르아켐 다리 주변 도로가 침수됐다.
프랑스 최고행정법원은 3일 프랑스 정부는 환경단체에 1유로(약 1330원)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그린피스 등이 “마크롱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며 상징적 차원에서 ‘1유로 소송’을 내자 법원이 환경단체의 손을 들어준 것. 파리 11구 주민 쥘리에트 씨(35)는 “2019년과 지난해 여름 최고 기온이 40도가 넘어 이집트 카이로보다 더 더웠다. 며칠 차이로도 기온이 확확 바뀐다”고 말했다.
친환경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녹색당’도 각국 연정의 주축이 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핀란드 연정에는 모두 녹색당이 포함돼 있다. 독일 녹색당 역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정당인 기독민주당(35%)에 이어 독일 내 정당 지지율 2위(20%)다. 메르켈 총리 은퇴 후 기민당과 녹색당의 연정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레타 세대(greta generation)’의 등장도 눈에 띈다. ‘환경소녀’로 유명한 그레타 툰베리(18) 이름에서 따온 명칭으로 기후변화 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젊은 세대를 뜻한다. 툰베리는 2019년 유엔본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기후변화 책임을 추궁해 젊은층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 탄소국경세 도입 가시화
유럽연합(EU)이 주도하던 환경 이슈에 미국이 다시 가세한 점도 세계 기후변화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취임 첫날부터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협약으로, 2100년까지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다. 2017년 6월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탈퇴를 선언했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다시 협약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역시 16일 본토 4분의 3이 눈에 덮이면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9억 달러(약 1조 원) 규모의 기상재난이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가 자주 발생하면서 탄소 감축 목표를 강제하는 각종 국제 조치가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전했다. 대표적 예가 EU가 2023년 도입을 목표로 추진 중인 ‘탄소국경세(Carbon Border Tax)’다. 환경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이나 탄소 함량이 높은 제품에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1t당 30유로가량(예상치)의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다. 다음 달 유럽의회 전체 회의에서 조속한 도입을 촉구하는 보고서가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 기후변화 대책으로 코로나19 후유증 극복
지구가 더워지면 이상기후뿐 아니라 전염병 확산에 유리한 환경이 된다. 유럽은 지난해 1981∼2010년보다 1.6도 높아져 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세계보건기구(WHO) 분석 결과 지구 평균기온이 1도 올라갈 때마다 한파, 홍수 등 이상기후와 모기, 병충해가 늘어 전염병도 4.7% 증가했다.
유럽 주요국은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경기 악화 등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수단 중 하나로 기후변화 대책 확대, 즉 ‘친환경 회복(Green Recovery)’을 꼽고 있다. 친환경 산업을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의도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대학생 마할 씨(22)는 “지구가 병들면 우리 미래 세대가 가장 큰 피해를 본다”며 “신재생에너지, 자연보전 업무 등 친환경적인 분야에 취업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1∼6월) EU 발전량 중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량 비율은 40%로 기존 화석연료(34%)보다 높았다. 탄소 배출 감축, 실시간 배출량 확인 시스템 등 탄소 분야 산업도 확대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12월 최종 합의된 1조8000억 유로(약 2412조 원) 규모의 EU 장기 예산안(2021∼2027년) 중 약 30%가 기후변화 대응에 할당됐다. 해당 예산 중 코로나19 회복기금인 7500억 유로(약 1005조 원) 역시 친환경 경제 체질 개선에 사용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붙었다.
유엔 ‘지속가능한 에너지 부문’ 특별대표를 지낸 레이철 카이트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학장은 뉴욕타임스(NYT)에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경제 재앙과 엄청난 일자리 감소가 초래되면서 기후변화는 급속히 의제에서 벗어났다”며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19 사태가 지속가능한 경제 회복과 일자리 창출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밝혔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