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철-박정원 교수 등 참여 ‘원자가 모여 핵 이루는 과정’ 확인 美연구진이 보유한 현미경 활용 7년간 화상 통화-이메일로 소통 “국제협력연구 성공 비결은 신뢰, 성과 중심 벗어나 정보 공유해야”
이원철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기계공학과 교수(왼쪽)와 박정원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가 16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결정핵 생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두 교수는 세계 최초로 원자 단위에서 핵 생성 메커니즘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이 논문은 국제 과학학술지인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한양대 제공
세상에 존재하는 고체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로 구성돼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바다에서 만들어지는 소금 모두 작은 원자로 시작해 큰 덩어리로 커진다.
이처럼 원자가 모여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선 ‘핵 형성(nucleation)’이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미세한 영역에서, 100분의 1초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져 그동안 핵 형성 메커니즘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국제 과학학술지인 사이언스는 1800년대 후반 이후 200년 넘게 지속된 핵 생성의 비밀이 담긴 논문을 게시했다. 이 비밀을 푼 사람은 이원철 한양대 에리카(ERICA)캠퍼스 기계공학과 교수와 박정원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가 주도한 국제공동연구팀이었다.
○200년 만에 드러난 핵 형성 과정
이 교수 등 공동연구팀은 핵 형성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원자 한 개 두께만큼 얇은 막 위에서 전자빔을 받으면 금(金) 원자를 방출하는 나노 물질을 합성했다. LBNL이 보유한 전자현미경으로 이 과정을 관찰했다. 금 원자가 모여 나노 결정으로 만들어지는 핵 형성 순간을 1000분의 1초 수준의 초고속 영상으로 촬영했다. 개별 원자가 식별되는 초고해상도 영상이었다.
공동연구팀은 원자가 무질서하게 모였다가 다시 정렬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핵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정 구조의 핵이 먼저 만들어진 뒤 그 구조를 유지하며 점점 커지면서 물질이 될 것이란 기존 이론을 뒤엎는 순간이었다.
연구팀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열역학 이론도 내놨다. 수십 개의 원자로 구성된 초기 핵 생성 단계에서는 무질서한 구조와 결정 구조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 두 구조의 에너지 차이가 크지 않아서 형태를 바꾸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적게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개 이상의 원자가 뭉칠 경우 ‘결정 구조’의 에너지 상태가 더 안정적으로 변하게 돼 ‘결정핵’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우연에서 출발한 ‘세계 최초’ 성과
이번 연구는 2013년 시작해 7년 가까이 이어진 장기간 국제 협력연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 연구는 이 교수와 박 교수의 친분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2006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유학생으로 처음 만났다. 이때 이 교수가 박 교수의 연구실에서 발견한 ‘이상 현상’이 시발점이 됐다.
이 교수는 “전자현미경 위에 놓인 판 위에 이상한 막이 생긴 걸 봤다”며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후 비슷한 현상을 다시 발견하면서 박 교수에게 ‘연구 가치가 있어 보인다’고 말한 것이 연구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신뢰 가능해야 국제협력 이뤄져
공동연구팀은 이번 연구의 성공 비결로 ‘신뢰’와 ‘개방’을 꼽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연구 결과를 상대방과 공유하는 개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성과 압박 없는 미국의 연구문화도 결과를 만드는 데 유리했다. 이번 논문의 공동 책임연구자인 어시어스 박사는 처음 연구 제안을 하자 “나는 책임연구자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대면 협력 연구가 활발해지기 위해선 이와 비슷한 연구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이 교수는 “비대면 연구일수록 자신의 연구 성과를 상대방에게 보낼 일이 많다”며 “내가 보내는 연구 성과를 상대가 가로채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방대한 분량의 연구 데이터를 온라인으로 주고받는 시스템도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로 꼽았다.
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