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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맞아야 해. 왜? 아시안이니까’ 美 번지는 증오범죄

입력 | 2021-02-22 13:27:00

16일 오후 뉴욕 퀸즈 지역의 길가에서 백인 남성에게 공격당하는 아시아계 여성


이달 16일 오후 미국 뉴욕 퀸즈의 한 제과점 앞에서 52세의 중국계 여성이 갑자기 한 백인 남성의 공격을 받았다. 이 남성은 다짜고짜 상자를 집어던진 뒤 이 여성을 강하게 밀어 도로에 넘어뜨렸다. 이마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은 여성은 인근 병원에서 다섯 바늘을 꿰매는 치료를 받았다.

같은 날 오전 뉴욕 맨해튼의 E호선 지하철 객실 안에서는 70대 아시안 여성이 40대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난데없이 얼굴을 가격 당했다. 여성이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가해자는 이미 도망간 뒤였다. 이 여성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 옆에 나보다 체구가 작은 비(非)아시안 여성이 2명이나 있었는데 나를 공격한 걸 보면 인종 혐오 범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아시안을 타깃으로 한 범죄가 최근 급증하면서 불안이 커지고 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의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돌리면서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이 주된 원인이다. 중국계 미국인들이 공격 대상일 경우가 가장 많지만 한국계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정권이 바뀌어서도 문제가 끊이지 않자 백악관과 연방 의회가 그 심각성을 파악하고 행동에 나섰다.

최근 아시안에 대한 차별과 범죄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내 아시안들의 권리 단체들이 연합한 ‘스톱 AAPI 헤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월 19일부터 연말까지 아시안에 대한 모두 2808건의 증오 범죄가 보고됐다. 언어폭력이 70.9%로 가장 많았고 무시나 기피행위가 21.4%, 기침과 침뱉기 6.4%, 신체적 폭력도 8.7%(중복 응답)나 됐다.

중국계에 대한 반감이 아시아계 전체에 대한 혐오로 퍼지면서 한국계 미국인이나 한국인의 피해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스톱 AAPI 헤이트’에 따르면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 가운데 15.1%가 한국계의 피해 사례였다. 보고서에는 미 서부에서 고속도로를 가던 중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71세 한인 남성의 사례도 적혀 있다.

아시안에 대한 공격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19에 ‘중국 바이러스’란 표현을 쓰면서 작년 초부터 빈발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낙인 찍기가 아시아계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혐오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증오 범죄는 트럼프가 물러나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오히려 더 과감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두 건의 강력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84세의 태국계 남성이 산책을 하다 갑자기 젊은 남성의 공격을 받았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이 노인은 이틀 뒤 사망했다. 오클랜드 지역에서도 한 남성이 길을 가던 91세 노인을 뒤에서 밀쳐 넘어뜨렸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 정치권이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행정명령을 통해 “나의 행정부는 아시아태평양계 공동체를 향한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규탄한다”면서 “연방 정부는 이들이 출신과 언어,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우를 받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이달 19일 트위터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증오 범죄의 증가에 깊이 우려한다”며 “우리는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고 우리의 이웃들을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수가 불어난 아시아계 연방 의원들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19일 미 연방의회의 ‘아시아태평양 코커스’(CAPAC) 소속 의원들은 화상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아시안을 상대로 한 혐오범죄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주디 추 CAPAC 의장 등 의원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위기 상황에 빠졌다”면서 의회의 ‘혐오방지법’ 통과와 바이든 행정부의 추가 대책을 촉구했다. 회견에 참여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백인 우월주의가 이런 범죄를 낳았다”면서 “증오범죄가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계인 앤디김 하원의원도 “우리나라에는 더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 있다”면서 혐오 범죄 타깃이 된 노인들을 가리켜 “그들이 나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