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한파가 전력 공급 중단과 주민들의 동사(凍死)로 번지고 있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그랙 에보트 주지사에 대한 비판이 끓어오르고 있다. 주지사의 무능한 대응이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공화당 소속인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로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현지 시간) 현재 텍사스에서 400만 가구 이상이 혹한과 정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난방과 수도 공급 중단으로 인한 피해 규모는 계속 늘고 있다며 “사람들은 가구를 태워 땔감으로 쓰고, 식료품점은 물품이 동났다”고 전했다.
에보트 주지사는 최근 TV인터뷰에 잇달아 출연해 자신이 긴급사태를 발령하고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청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강조했다. ERCOT는 텍사스주 전력망 운영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는 ERCOT가 예비 전력을 구축하지 않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를 자신과도 공유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에보트 주지사 재임 기간에 텍사스에서 연달아 ‘재앙’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도 회자됐다. WP에 따르면 2017년에는 허리케인 하비로 텍사스에서 68명이 숨졌다. 최소 여섯 건의 대규모 총기난사 사건도 벌어져 70명이 숨졌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는 주에서 4만20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번 한파로 32명이 숨졌다. WP는 “이 사건들이 모두 에보트 주지사 임기 6년 동안 벌어졌다”고 꼬집었다.
언론은 재난의 순간마다 에보트 주지사가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기 보다는 정치적인 손익 계산을 먼저 했다고 비판했다. 또 그가 ‘현실성 없는’ 입법적 해결책을 의회에 요구하며 마치 재난에 대응한 듯이 행동했다고 WP는 보도했다. 그러면서 ‘보수 진영의 리더’로 자리 매김 하기 위해 분투했다고 전했다.
이전까지는 텍사스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에보트 주지사의 방식이 통했다. 그의 임기 동안 약 300만 명의 인구가 텍사스로 유입됐다. 이는 많은 일자리 때문이었다. 또 낮은 세율과 풍부한 주택 공급도 한 원인이었다. 에보트 주지사는 미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보다 자신이 주지사로 있는 텍사스가 낫다며 “나의 텍사스를 캘리포니아처럼 만들지 말라!”는 후원모금회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이달 초 한파가 닥치기 전에 실시된 미국 휴스턴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에보트 주지사의 지지율은 39%로 나타났다. 이는 임기 초 40~50%보다 1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이다. 에보트 주지사의 이번 한파 대응 실패가 마치 2005년 뉴오클랜드에서 대규모 사상자를 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와 닮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미 기상학자들이 한파 전에 ‘역대급 혹한’이 몰아칠 가능성을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보트 주지사가 대응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력공급 중단 문제도 이미 한파가 닥치기 일주일 전에 경고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미 10여 년 전 “혹한에 대비해 텍사스 전력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지역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이를 무시했다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민주당 소속인 코너 케니 전 오스틴 계획위원장은 “에보트 주지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그가 한 것이라고는 자신이 지휘하는 주 행정부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주지사 측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텃밭으로 분류되는 텍사스에서도 이번 에보트 주지사의 실정(失政) 탓에 다음 주지사 선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에보트 주지사는 내년 재선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 공화당 로비스트인 빌 하몬드 전 텍사스 비즈니스협회장은 “이번 사태로 주지사의 지지율은 단기적으로 급락할 수밖에 없다”며 “사태 책임자인 만큼 모든 책임과 비난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에보트 주지사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력망 개선 등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와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몬드 전 회장은 “아직 다음 겨울이 오기 까지는 시간이 매우 많다”며 이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번 혹한 때문에 11살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지역 전기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ABC뉴스는 정전된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크리스티안 파본 피네다 군의 가족이 전력회사 두 곳을 상대로 1억 달러(약 11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파네다 군은 혹한의 날씨에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동사(凍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