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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점자’ 창안 송암 선생 생가 복원한다

입력 | 2021-02-26 03:00:00

인천시-강화군, 13억여원 투자
고증 작업 거쳐 생가 설계 완료
6월 완공 위해 터 닦기 공사 한창
유품 한데 모은 송암기념관 건립도




한글점자를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와 맞붙은 지역에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교동교회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로 남아 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사진)이 태어난 생가(인천 강화군 교동도 달우물마을) 복원 사업이 본격화됐다. 송암은 제생원 맹아부(현 국립 서울맹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일본어로 된 점자만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 1923년 조선어점자연구회를 조직한 데 이어 1926년 한글 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했다.

20일 교동대교를 건너 농로를 따라 들어가자 자동차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송암 선생의 생가 터가 나타났다. 멀리 바닷가가 바라다보였고 인가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마을 중간지대 벌판에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인천시와 강화군이 13억8000만 원을 들여 올 6월까지 초가집 형태의 생가 복원을 하기 위해 터 닦기 공사를 한창 벌이고 있었다. 사유지였던 생가 터(2244m²)를 사들였고, 사라진 옛 건물의 사진과 송암 친척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고증 작업을 거쳐 생가 설계 작업을 마쳤다.

생가 터 바로 앞에는 송암이 다니던 교동교회가 있다. 마당엔 10m 정도 높이의 종탑이 서 있고, 교회 내부는 나무 대들보와 원목 바닥을 한 옛 모습이다. 교회로 들어가는 2개의 문 앞에는 돌계단이 5, 6개씩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교회 설립 당시 남녀가 좌우의 문으로 따로 출입하고, 예배를 볼 때도 중간에 가림막을 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회 주변 마을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 요즘 교회 문은 닫은 상태였다. 송암 선생의 후손이 이 교회의 목사를 맡고 있었는데, 유리창문에 그의 연락처를 적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목사와 통화를 하고 교회 내력을 들어봤다. 목사는 “교회는 당초 초가지붕이었지만 1970년대 양철 지붕으로 교체했다. 마루, 대들보, 서까래 등은 지을 당시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송암 선생 집안은 기독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교동도 해안 수비대장(수군만호)이었던 송암의 할아버지가 갯바위에 부딪쳐 해안에 표류하던 영국의 감리교 목사를 구출해 돌봐 주다 집안사람들 모두가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 송암은 1905년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를 다닌 뒤 교육자의 길로 나섰다. 그는 1931∼1957년 구약과 신약 등 성서 전체의 점역을 완성하는 등 점자로 보급한 책자 76점을 남겼다. 그의 육필 원고와 자료들은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내 송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강화군은 안채, 행랑채 등 초가집 형태의 생가를 86m² 규모로 지으려 한다. 마당에 송암 흉상을 설치하고, 주변에 녹지공간을 조성하기로 했다. 교동대교∼월선포 2.1km의 해안도로를 신설하면서 이 도로에서 생가 터까지의 진입로(160m)도 만들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송암박두성문화사업회는 송암 유가족들과 협의해 인천 남동구에 있는 송암 묘를 생가 터 주변으로 이장하는 한편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유품들을 전시할 송암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박상은 송암박두성문화사업회 이사장(전 국회의원)은 “송암 선생이 사용했던 제판기, 점자 타자기 등의 유물 48점은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며 “생가 복원을 계기로 이런 역사적 인물의 유업과 정신을 이을 의미 있는 문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