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건 유도훈 감독과 전자랜드의 도전
“인생을 걸고 한 시즌을 치러 보겠습니다.”
2020~2021시즌 프로농구 개막을 앞둔 지난해 10월. 모기업 전자랜드가 농구단 매각을 결정한 상태에서 새 시즌을 치르게 된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54)은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2003년 8월 인천 SK 빅스를 인수해 프로농구에 뛰어든 전자랜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인해 이번 시즌까지만 팀을 운영하기로 했다.
현재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한 전자랜드와 한국농구연맹(KBL)은 공개 입찰을 통해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입찰이 다음달 2일 마감되는 가운데 금융, 게임회사 등이 농구단 운영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감독과 선수들은 성적이 구단의 가치로 직결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코트에 나서고 있다.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전자랜드라는 이름을 달고 뛰는 마지막 시즌인 만큼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 전자랜드의 ‘정신적 지주’ 유도훈
전자랜드가 농구단 매각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과 2016년에도 재정 문제로 매각을 시도했지만 인수 기업이 나타나지 않아 무산됐다. 2009~2010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2010년 4월 전자랜드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 유 감독은 여러 풍파에도 12시즌 동안 전자랜드의 벤치를 꿋꿋이 지키며 선수들과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과거에 그는 농구단이 매각 위기를 벗어난 뒤 힘든 기억은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으로 세족(洗足)식을 열어 선수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지하철 1호선 부평역으로 나가 선수들과 함께 거리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유 감독은 “한 배를 탄 가족인 우리가 더욱 똘똘 뭉쳐야 한다. 모기업이 어렵다는 이유로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전자랜드 관계자는 “공교롭게도 유 감독이 재계약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농구단 매각설이 나왔다. 그럼에도 유 감독은 힘든 상황에 놓인 팀과 끝까지 동행하겠다면서 흔들리는 선수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유 감독의 노력이 없었다면 모기업과 농구단의 이별이 더 빨리 이뤄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전자랜드는 거액을 들여 리그 최정상급 자유계약선수(FA)를 영입하는 일이 드물어 투자에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 감독은 팀의 선수 육성 정책에 따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몸값 10억 원짜리 FA를 데려오기보다는 10억 원짜리 선수를 키우겠다는 생각으로 팀을 이끌어왔다. 발전 가능성이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전자랜드가 ‘기회의 팀’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유 감독이 설정한 정책에 맞춰 모기업은 선수들의 해외연수(스킬 트레이닝 참가) 등을 적극 지원했다.
유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전자랜드는 젊고 발전 가능성이 큰 선수들의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이변을 일으킬 수 있는 ‘다크호스’로 성장했다. 유 감독 부임 이후 전자랜드는 9차례 6강 플레이오프(PO)에 진출했다. 2018~2019시즌에는 PO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했으나 현대모비스에 1승 4패로 무릎을 꿇으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유 감독은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까지 챔피언결정전과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많은 땀을 흘린 선수들에게 꼭 우승 트로피를 안겨 힘든 상황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결과의 달콤함을 알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자랜드의 가드 김낙현은 매끄러운 게임 리딩을 바탕으로 팀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KBL 제공
● 아름다운 이별과 빛나는 새 출발을 위해
유 감독의 취미는 등산이다. 평소 그는 팀의 창단 첫 우승을 향한 꿈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빗대어 설명한다. 유 감독과 선수들은 최고의 자리에서 전자랜드와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또한 이번 시즌의 우승은 농구단의 새 주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리그 최고의 팀을 운영하게 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팀 운영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예선에 따른 휴식기를 마친 프로농구가 24일 재개된 가운데 전자랜드는 10개 구단 중 공동 4위를 달리고 있다. 1위 KCC와의 승차는 6경기.
유 감독이 공을 들여 키운 국내 선수들은 이번 시즌 최고의 경기력을 뽐내고 있다. 국가대표 가드 김낙현(26)은 평균 14.3득점(전체 국내 선수 중 5위),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포워드 이대헌(29)도 개인 통산 시즌 최다인 평균 12.8득점, 4.1리바운드로 골밑을 튼튼히 지키고 있다. 둘 모두 신인 시절에 ‘대어(大魚)’로 주목받은 선수들은 아니었다. 김낙현은 2017년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였고, 이대헌은 2015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SK 입단 후 2016년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로 프로에 입성했다.
유 감독은 “항상 선수들에게 10개 구단 선수 중 각자 포지션에서 랭킹 1, 2위 안에 들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라고 말한다. 김낙현과 이대헌 등 국내 선수들이 성장한다면 우리 팀은 조금 더 우승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랜드는 휴식기에 공격력 강화를 위해 새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했다. 전자랜드의 새 얼굴인 데본 스캇(왼쪽)과 조나단 모틀리. 전자랜드 제공
유 감독은 6강 PO 진출 및 챔피언결정전 우승 도전을 위해 이번 휴식기에 승부수를 던졌다. 득점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외국인 선수 에릭 탐슨(평균 7.9득점)과 헨리 심스(평균 14.5득점)를 모두 교체한 것이다. 유 감독은 “5라운드(한 시즌은 총 6라운드)를 치르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 선수 두 명을 모두 교체하는 것은 모험”이라면서도 “득점력 강화를 위해서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탐슨과 심스가 뛸 당시 전자랜드는 전체 팀 득점에서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28%에 불과했다. 이는 10개 구단 중 KT(26.28%) 다음으로 낮은 수치다.
새롭게 전자랜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 선수는 조나단 모틀리(26)와 데본 스캇(27)이다. 전자랜드의 공격 1옵션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모틀리는 208cm의 키에 224cm의 윙스팬(양팔을 벌린 길이)을 가진 센터다. 미국프로농구(NBA) 댈러스, LA클리퍼스 등에서 뛰었던 그는 지난 시즌 G리그(NBA 하부리그)에서 26경기에 출전해 평균 24득점, 8.1리바운드라는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NBA 재입성을 노리던 그는 워싱턴과의 협상이 불발되면서 한국 무대를 밟게 됐다. 키 203cm의 포워드 스캇은 최근까지 이스라엘 1부 리그에서 뛴 선수로 내 외곽 공격에 모두 강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감독은 “스피드와 탄력이 좋은 모틀리와 농구 센스가 뛰어난 스캇이 접전 상황에서 해결사로 나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농구단이 최고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팀을 운영하는 마지막 시즌임에도 외국인 선수 교체에 따른 추가 비용(연봉 등)을 지원한 모기업에 감사를 표했다. 유 감독은 “우리가 우승에 도전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을 실어준 전자랜드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전자랜드는 26일 오후 7시 안방인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오리온과 맞붙는다.
인천=정윤철기자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