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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공수처장은 ‘법의 지배’를 말했다

입력 | 2021-03-01 17:57:00


역사든 과거든 그중에서 무엇을 기억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과거 나의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든다. 하지만 어떤 과거를 기억할지 선택한 것이 나를 만들 수도 있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역사의 기억은 더욱 그러하다.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이번 삼일절 역사에선 문재인 대통령은 위기 극복을 선택했다. “3·1독립운동으로 우리는 식민지 극복의 동력을 찾았고 민족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었다”며 100년 전 의학도의 헌신과 현재 의료진의 노고, 국민의 인내, 그리고 현 정부의 성과를 연결하는 식이다(“충분한 물량의 백신과 특수 주사기가 확보됐다”는 언급은 참 뜬금없다).

그 앞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자유와 독립의 외침은 평범한 백성들을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태어나게 했고 정의와 평화, 인도주의를 향한 외침은 식민지 백성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함성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3·1운동에서 비롯된 ‘민주공화국’을 놓고 최근 인상적 연설을 한 사람이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김진욱 처장이다.

● 군주제와 공화제의 차이를 아는가
관훈클럽이 초청한 포럼에서 김진욱은 “남산 둘레길에서 일본 통감관저의 터,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 기억의 터, 중앙정보부 터 등을 탐방하며 남산에서 군주국가 조선과 제국주의 일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흔적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동아일보 DB



1910년 순종은 한일병합조약으로 주권, 인민, 영토를 포기했다. 군주에게 국가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권이 있는 군주국 시절이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못 박았고, 우리 헌법으로 계승됐다. 문 대통령 연설대로 3·1운동의 외침이 평범한 백성들을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태어나게 한 거다.

김진욱은 남산의 역사 탐방에서 군주국과 민주공화국의 차이를 기억했다.

“군주국이 백성을 위한다는 민본주의 사회라면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군주국이 군주가 법을 통치의 수단 삼아서 통치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민주공화국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고 군주조차도 법 아래에서 법의 적용을 받는, 법의 지배가 통용되는 사회입니다.”

즉 대통령제에선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고 ‘법의 지배’를 받는 사회가 민주공화국이라는 기억을 공수처장 김진욱은 선택한 것이다.

●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이 당연한 연설에 주목한 것은 공수처의 특별한 위상 때문이다. 공수처는 검찰이 수사 중인 고위 공직자 사건도 넘겨받아 수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야권에선 “공수처가 검찰수사 중인 현 정권 관련 비리 사건을 가져와 ‘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무력화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언제 폐쇄하느냐”며 챙겼던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 청와대가 개입된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라임·옵티머스 정관계 로비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공수처 현판 제막식. 동아일보 DB



그런데 김진욱은 거꾸로 “권력자이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는 의문 때문에 공수처가 생긴 것이고, 공수처는 법의 지배를 구현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법에 의한 지배’가 정치적으로 유불리를 따져 법을 적용하는 것이라면, ‘법의 지배’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렇다면 김진욱이 공수처로 월성 1호기 사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을 이첩받아서는 그야말로 법대로, 대통령이든 대통령비서실장이든 누구도 법 위에 있지 못하도록, 추상같이 수사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집권세력의 허를 찌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가장 한국적 인과응보(因果應報)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닐 수 없다.

● 역사에 사필귀정은 있는가
문 대통령의 대학 후배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사 이규원도 자기들 사건을 공수처로 보내달라고 주장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금 사건 수사를 중단시킨 혐의로 수원지검에서 수사 중인데 공수처로 이첩되면 수사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사건 자체가 문 대통령이 2019년 3월 18일 “검찰과 경찰 조직의 명운을 걸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지시하는 바람에 터졌기 때문이다.

판검사에 대해선 공수처가 기소권까지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검사와 고위경찰이 정권 관련 사건을 함부로 수사할 수 없기를, 재판에 넘기더라도 판사들이 양심껏 실형을 내릴 수 없는 ‘독재 수사처’를 문 정권은 노렸다고 나 역시 생각했다.

그러나 김진욱이 민주공화국의 ‘법의 지배’를 실현한다면, 역사가 달라진다. 대한민국이 달라질 수도 있다. 102년 전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것처럼,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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