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정이삭 감독의 작품세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정체성 혼란 작품에 녹여내 데뷔작인 ‘무뉴랑가보’서도 종족간 대학살로 고통받는 르완다 소년들의 혼란 그려… “국경 초월 영화 만들고 싶었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무뉴랑가보’(왼쪽 사진). 같은 르완다인이지만 부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정에 금이 간 두 소년의 이야기다. 이 영화로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두 번째 장편 ‘러키 라이프’(오른쪽 위 사진)는 암에 걸린 주인공과 마지막 여행을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세 번째 장편 ‘애비게일 함’(오른쪽 아래 사진)은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며 돈을 버는 주인공이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영화 화면 캡처
영화 ‘미나리’를 만든 리 아이작 정(정이삭·43) 감독은 그동안 네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영화는 장편 데뷔작 ‘무뉴랑가보’(Munyurangabo·2007년)를 비롯해 ‘러키 라이프’(Lucky Life·2010년) ‘애비게일 함’(Abigail Harm·2012년) ‘미나리’(2020년), 다큐멘터리는 ‘아이 해브 신 마이 라스트 본’(I have seen my last born·2015년)이다. 짧게는 11일, 길게는 두 달 동안 저예산으로 만든 이 작품들에 대해 영화계는 “작품성이 뛰어나지만 많은 관객이 볼지는 의문”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정 감독이 상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생태학을 전공하고 의대 진학을 준비하다가 필수교양 학점을 이수하려고 들은 영화 수업을 계기로 진로를 바꿨다. 그에게 영화란 자신의 정체성과 고민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첫 영화 무뉴랑가보는 정 감독이 봉사활동차 아내와 함께 르완다를 찾은 데서 시작됐다. 그는 촬영 경험이 없는 르완다인 배우와 스태프들을 현지에서 캐스팅해 11일 동안 자비를 들여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94년 후투족이 투치족을 집단 학살한 ‘르완다 대학살’ 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고 살아가는 두 종족 소년의 우정을 그렸다. 영화 제목은 이 중 한 소년의 이름이다. 영화는 2007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다.
무뉴랑가보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르완다 소년들의 시선을 빌려 표현했다면 미나리에선 정 감독 본인의 유년시절을 직접 가져왔다. 1980년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가족들의 미국 정착기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가장의 성공을 향한 야망, 그로 인해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정 감독의 영화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 건 아니다. 무뉴랑가보 이후 만든 러키 라이프는 죽음을 둘러싼 삶의 비극에 천착했다. 영화는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제이슨과 그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다. 정 감독은 2010년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암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비극과 기억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영화 애비게일 함은 그가 제작한 영화 중 유일한 판타지다. 배경은 모든 인간관계가 금전 거래를 기반으로 해 이뤄지는 가까운 미래의 미국 뉴욕. 주인공 애비게일 함이 사랑에 빠진 남성은 인간인지 아닌지, 어디에서 왔는지 모든 게 베일에 가린 존재다. 재밌는 건 한국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모티브를 땄다는 것. 나무꾼이 선녀 옷을 훔쳐 선녀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처럼, 애비게일도 가운을 입어야 돌아갈 수 있는 남성의 옷을 몰래 훔친다.
전작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에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미나리가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찍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묵묵히 만들어온 그는 장편 데뷔 14년 만에 자신이 구축한 독보적 예술세계에 대해 세계적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차기작은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리메이크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