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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 신동아 기자
미국 주간 ‘포브스’는 이 내용을 소개하면서 ‘디지털 환생’에 대해 언급했다. 관련 기술이 현실화할 경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을 터다. 그 결과로 고인의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현실에 되살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날이 오면 삶과 죽음, 사람과 기계, 실재와 가상의 경계는 어떻게 될까. 2013년 개봉한 영화 ‘그녀(her)’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 작품이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내와의 이혼을 앞두고 외로움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남자다. 퇴근길에 ‘세계 최초의 AI 컴퓨터운영체제’라고 광고하는 ‘OS1’을 불쑥 구매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축 처진 어깨 위에 어쩐지 안 어울리는 듯 보이는 오렌지레드색 셔츠를 걸친 테오도르는, 컴퓨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OS가 설치되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모니터에는 똑같은 오렌지레드빛 대기 화면이 펼쳐지고, 그 위에서 컴퓨터 작동을 알리는 나선형 무늬가 나풀나풀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기계음이 들린다. “테오도르 톰블리 씨, OS1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톰블리는 2005년 미국 뉴욕 가고시안갤러리에서 ‘바커스(Bacchus)’ 연작을 선보였다. 당시 캔버스를 가득 채운 건 이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색채의 나선무늬였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테오도르에게 ‘톰블리’라는 성을 주고, 그 화가가 사랑한 색깔 셔츠를 입히고, 같은 색 대기화면 위에 나선무늬가 떠오르도록 만든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가 휘갈긴 낙서를 연상시키는 톰블리의 화풍은 한때 대중은 물론이고 평단과 동료 예술가들에게도 외면 받았다. ‘대체 이런 것을 미술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도 촉발시켰다. 톰블리는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세상의 고정관념을 바꾸고 현대 예술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힌 화가다. ‘그녀’에서 테오도르의 삶도 이와 닮았다. 그는 사람과 기계 혹은 실재와 가상 따위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을 ‘사만다’라고 소개하는 허스키한 목소리의 AI에게 곧 마음을 열고 진실한 소통을 향해 용감히 나아간다.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영화 내내 화면을 따뜻하게 감싸는 톰블리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