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권력자의 초상
주원장의 초상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세 사람 중 가장 화끈한 권력의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은 주원장이다. 진시황은 황제가 되기 전에 이미 왕자였고, 마오쩌둥은 도서관 사서였던 반면, 주원장은 거지에 가까운 처지에서 떨쳐 일어나 반란군 수뇌를 거쳐 마침내 명나라(1368∼1644년) 초대 황제가 되었다. 주원장은 황제로 등극한 뒤에 국무총리 격인 재상직을 없앴고, 서슴없이 대신들에게 곤장을 쳤으며, 5만 명이 넘는 관료를 숙청하기도 했다.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지식인 황종희(黃宗羲·1610∼1695)는 주원장이 황제권을 남용한 데서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찾기도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라고 해서 폭군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면 아름다운 자기 이미지를 후대에 길이 남기고 싶어 한다. 주원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식 초상화가 보여주는 주원장은 다소 엄해 보이기는 할지언정, 관찬 역사서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이 묘사하는 것처럼 귀태가 질질 흐르는 유능한 통치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아무리 강한 황제 권력도 사회 저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미시적 저항까지 모두 통제하기는 어렵다. 강력한 황제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강력한 황제권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공식 초상화와는 완연히 다른 주원장의 초상화가 다수 유통되었다. 이 비공식 초상화들은 공식 초상화와는 달리 사납고 천박하고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주원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여러 초상화 중에 어느 것이 진짜 권력자의 모습일까? 그것을 알 도리는 없다. 판단의 기준이 될 피사체가 이미 사멸하고 없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살아 있다고 한들, 그 모습이 한결같을 리는 없다. 지난달 16일, 멕시코 소노라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생각해 보라. 한 여성이 남편의 휴대전화에서 남편이 아름다운 여성과 밀회를 즐기는 사진을 발견했다. 확실한 불륜 증거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격분해서 흉기로 남편을 수차례 찌른 끝에 연행되었다. 그런데 확인 결과 휴대전화 속 사진은 다름 아닌 본인의 옛날 사진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건에서 무엇이 그 여성의 진정한 얼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원본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미지에 묻어 있는 욕망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작년에 한 누리꾼이 앱을 통해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웃는 얼굴로 ‘보정’하고, 그 사진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유관순 열사 사진을 볼 때마다 고문으로 부은 얼굴이 안쓰러웠다. 10만 원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렇게 웃는 사진이었으면 한다. 부디 열사의 평안을 빈다.” 그 엄혹한 시대에 유관순 열사가 과연 활짝 웃고 싶었을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보정된 사진은 유관순 열사의 당시 모습보다는 나중에 보정한 사람의 욕망을 더 잘 드러낸다. 우리가 증명사진을 ‘뽀샵질’할수록 보다 선명해지는 것은 원본의 모습이 아니라 ‘뽀샵질’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의 욕망이다.
유관순 열사 사진 보정이 있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체육관광부는 100원 동전의 이순신 표준영정 해제를 심의 중이라고 발표했다. 표준영정의 작가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었기에 교체를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표준영정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바뀌는 표준영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대 혹은 이 정부의 열망이다. 사람들이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진실보다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면, 이미지를 볼 때 상상해야 할 것은 재현 대상이 된 원본이 아니라 그 재현물에 묻은 욕망이다. 원본은 여기 없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