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츠 폰 슈빈트 ‘마왕’.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괴테의 ‘마왕’은 슈베르트의 작곡 이전에도 유명한 작품이었다. 최고 시인 괴테는 마왕이 소년을 죽게 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걸작을 빚어냈다. 아름다운 운율의 시 한 편 안에 해소될 길이 없는 극한의 대립과 긴장감, 두려움과 유혹, 살고자 하는 의지와 절망을 절묘하게 응축해낸 것이다. 바람이 심한 밤,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질풍같이 말을 달린다. 마왕이 추격하며 아이를 유혹한다. 그는 집요하게 아이만을 공략한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외친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아버지는 마왕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아이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단지 마왕의 등장이 무서운 게 아니다. 고립되어 있다는 절망감이 두려운 것이다. 아이는 마침내 절망한다.
열일곱 살 슈베르트는 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등장인물 세 사람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아이의 공포에 찬 고음의 비명에도 아버지는 태연하게 저음에만 머문다. 나르시시스트 마왕은 잔인하게도 벌벌 떠는 아이 앞에서 세련되고 우아하게 미적 유희를 펼쳐 보인다. 지켜야 하고 빼앗아야 하는 이 둘은 아예 다른 세계를 사는 까닭에 서로 대립할 일이 없다. 오히려 이 둘은 아이의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을 가진다.
학교폭력으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간다. 학교가 어른들의 세상과 분리되어 매 맞는 아이가 고립된다면 그 또한 마왕의 무대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마왕’도 아이다. 아이가 아이에게 마왕이 된다. 공감 능력을 벌써부터 잃어가고 있는 아이들. 어쩌면 우리가 마왕을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의 무감각, 성취에만 몰두하는 욕심, 아이들의 불안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관심이 그들을 절망케 한 것은 아닐까. 아이를 지키는 일은 아이와 함께 웃고 함께 울어서 그가 마왕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과 같다. 마왕을 들으며 나는 그 죽은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