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타블로이드 언론 때문이다.”
7일(현지시간) 미 CBS방송 인터뷰에서 ‘영국 왕실이 아들 아치의 피부색을 우려했다’고 폭로한 해리 왕손(37), 메건 마클 왕손빈(40) 부부가 미공개 녹화영상에서 밝힌 말이다.
지난해 1월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거주지를 미국으로 옮긴 배경으로 ‘극성맞은 영국 언론’을 지목한 것이다. 미국에서만 1710만 명이 왕손 부부 인터뷰를 시청한 가운데 미디어의 조명이 ‘왕실 일원으로 감내해야 할 일’이란 주장과 ‘지나친 프라이버시 침해’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발언은 미국보다 하루 늦은 8일(현지시간) 저녁 영국 ITV에서 방영된 왕손 부부 인터뷰 본편과 함께 영국 내 찬반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더 타임스는 칼럼을 통해 “언론이 영국 왕족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며 “영국 왕실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일일 드라마이며, 마릴린 멀로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같은 스타들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했다.
설문조사업체 유고브의 지난해말 조사에서 65세 이상 영국민 80%는 선출직보다 영국 왕실을 선호한다고 답한 반면 18~24세 젊은 층은 40%에 그쳤다. 시대가 지날수록 왕실 일원은 대중의 ‘꿈’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나 유사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 집계결과 7일 해리 왕손 부부 인터뷰 방송은 미국인 1710만 명이 시청했다. 올해 황금시간대 프로그램 중 가장 많은 시청 수이자 월드컵 등 주요스포츠 이벤트에서나 가능한 수치라고 블룸버그 통신은 전했다. 가디언은 “영국 방영권을 가진 ITV도 이미 하루 전 내용이 다 공개된 인터뷰 방영권을 100만 파운드(약 16억 원)에 사는 등 현재 70여 개 국에 방영권이 팔렸다”며 “해리 왕손 부부 인터뷰는 영국 왕실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 더해져 영화, 방송 분야에 ‘황금덩어리’”라고 전했다. 더선, 데일리메일,데일리미러 등으로 대표되는 영국 타블로이드의 왕실 사생활 취재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해리의 모친 다이애나 빈(1961¤1997)도 타블로이브 언론을 피하려다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해리 왕손 부부는 이런 비극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에 지난해 4월 타블로이드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는 ‘무(無)응대’ 정책을 선언했다.
영국 언론의 인종차별과 편협성은 뉴스룸 인종 비율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 조사결과 전체 영국 언론사 소속 기자들의 6%만이 유색인종이었다. 흑인기자의 비율은 0.2%에 그쳤다. CNN은 “백인인 영국 왕실의 맏며느리 케이트 미들턴과 혼혈인 마클의 언론보도가 극명하게 대조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인종차별, 타블로이드 취재 관행 등 논란이 커지고 있지만 영국 정부와 왕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8일(현지시간) 왕손 부부 인터뷰 관련 질문에 “여왕을 최고로 존경해왔다”며 답을 피했다. 왕실 역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편 해리 왕손 부부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미 할리우드 배우이자 감독 타일러 페리(51)가 큰 역할을 했다고 BBC는 전했다. 페리는 지난해 1월 왕실 독립을 선언한 후 막막해하는 이들 부부에게 LA 베버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과 경호 인력을 무료로 제공했다. 페리는 6억 달러(약 6850억 원)의 자산가로, 흑인을 중심에 둔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 제작할 정도로 인종평등을 중시해왔다.
파리=김윤종 특파원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