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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무죄 아니면 사형을” 일 왕궁에 폭탄 던진 김지섭의 외침

입력 | 2021-03-16 11:40:00

1924년 4월 25일






플래시백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어둠이 깔린 도쿄의 일왕 궁성 근처를 한 사람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었으니 빨리 돌아가라는 경찰의 말도 듣지 않던 이 사람은 갑자기 궁성으로 들어가는 니주바시(이중교)에 폭탄 한 개를 던졌습니다. 그리곤 경찰을 밀치고 궁성을 향해 돌진했죠. 경비병들이 달려오자 두 번째, 세 번째 폭탄을 연이어 던진 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일본 열도를 경악하게 만든 이 사람은 39세의 의열단원 김지섭이었습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지섭은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익혔습니다. 머리가 좋아 천재소리를 들었다고 했죠. 스물한 살 때 일어학교에서 두 달 만에 일어를 끝냈고 곧이어 재판소 서기시험에 합격해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했답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그동안 하던 법원 서기 겸 통역 일을 던져버리고 중국 시베리아 등으로 독립의 길을 찾아 나섰죠.

김지섭은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일제의 주요 기관과 요인을 없애 민족을 깨우치겠다는 마음을 굳혔던 것이죠.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의열투쟁에도 자금이 필요했거든요. 그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던 것도 자금을 얻어 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1922년 12월 경성에 잠입해 판사 백윤화에게 5만 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고요. 의열단이 1923년 3월 폭탄 36개와 권총 5정 등을 경성에 들여와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을 실행하려고 할 때도 김지섭은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 황옥이 관련된 바로 그 계획이었죠. 판사 백윤화에게 5만 원을 요구할 때도, ‘제2차 암살‧파괴 계획’ 때도 동지들은 붙잡혔지만 김지섭은 용케 몸을 피했습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으로 죄 없는 동포 6600여 명이 학살당하자 그는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1924년 1월 도쿄에서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기사를 읽고 일제 수상과 대신, 의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죠. 상하이에서 일본 석탄운반선에 숨어 타고 후쿠오카로 밀항했습니다. 열흘 만인 1923년 12월 30일 도착했을 땐 뼈만 앙상했고 몸에 지닌 것은 폭탄 3개와 여비 100원, 나카무라 히코타로라는 가짜명함 30장뿐이었습니다.

도쿄로 가던 도중 의회가 휴회했다는 소식에 왕궁으로 대상을 바꿨으나 폭탄이 모두 터지지 않는 바람에 목적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으로 법정에서도 맹렬하게 싸웠죠. 혹독한 고문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1시간 20분이나 모두진술을 했죠. “총독부가 조선사람을 개나 말 같이 여긴다…이를 일본사람에게 알리는 동시에 정치가에게도 반성을 하게 하려 했다”며 거사 동기를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우리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 행동했으므로 벌 받을 까닭이 없다”며 무죄석방하든지 사형을 내리라고 요구했죠.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2심에서도 ‘무죄 아니면 사형!’ 요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변호사’로 불린 후세 다쓰지 등 일본인 변호사들이 애를 썼지만 또 무기징역형이었죠. 그는 2심을 앞두고 구속만기가 됐는데도 석방하지 않자 성치 않은 몸에 유서를 써놓고 단식투쟁을 벌일 만큼 강단이 있었습니다.

치바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1928년 2월 독방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뒀습니다. 뇌일혈이었죠. 43세의 짧은 일생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쏠린 의혹의 시선은 부검으로 풀렸습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간 친동생 김희섭에게 돌아온 것은 한 줌의 재와 형무소가 불허한 편지 몇 통 그리고 노역의 대가인 14원 30전이었죠. 안동 고향에는 같이 산 적이 거의 없던 아내와 양자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보도 해제가 있던 1924년 4월 25일자를 시작으로 김지섭 관련 소식을 꾸준하게 전했습니다. 일본 현지에서 열린 재판에는 특파원을 보냈고 1925년에는 김지섭의 옥중수고를 변호사로부터 건네받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言論集會壓迫彈劾會(언론집회압박탄핵회)』
당국의 무지한 압박이 만들어 준 새로운 모임
두 가지 결의를 목표로 최후까지 분투할 작뎡
警官(경관) 監視下(감시하)에 三十一個(31개) 團體(단체) 奮起(분기)

언론집회에 관한 당국의 태도가 최근에 이르러는 더욱더욱 심하야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엇다는 소위 『문화정치』의 근본정신도 업서지리만큼 너무도 압박이 심하야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긔보한 바와 가치 서울에 잇는 각 사상단톄와 언론긔관을 모다 망라하야 대중의 우렁찬 여론으로써 당국의 반성을 촉진식히는 동시에 오랫동안 소리 업시 잠잠하고 느른하든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긔를 던지고저 각 단톄의 대표자들이 모히어 가장 온건한 구톄 방침을 협의 결뎡하게 되얏다.

雲集(운집)한 百餘代表(100여대표)
벽두에 명칭문뎨를 토의

언론집회에 압박이 너무도 심한 당국의 태도에 대한 구톄뎍 방침을 강구하려는 각 단톄의 모임은 예뎡과 가치 재작일 오후 세 시부터 시내 수표뎡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안에서 설흔한 단뎨의 대표자 백여명이 모히어 십여명 경관의 살긔 가득한 감시 하에서 개최되엿는데 위선 벽두에 한신교(韓愼敎)씨의 간단한 취지 설명과 함께 개회사가 잇슨 후 의사를 순서 잇게 진행하기 위하야 림시석댱으로 서뎡희(徐廷禧)씨와 림시서긔 신일용(辛日鎔)씨를 선거한 후 즉시 본회의에 들어가 먼저 이번 모임의 이름을 짓기로 하야 혹은 재경단톄련합회(在京團體聯合會)이니 혹은 언론옹호회(言論擁護會)이니 혹은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이니 하야 자못 의론이 분분하다가 마참내 대다수의 의견을 조차 언론집회압박탄핵회라는 일홈을 짓게 되얏더라.

决議條項(결의조항)
두 가지를 결의

작년 가을 관동진재 이후에 당국자의 언론압박이 엇더하얏든 것을 참고로 군중에게 알리기 위하야 각 단톄 관계자의 간단한 경과보고가 잇서 지난번에 로농총동맹에서 여섯 사람이 모히여 집행위원회를 하다가 두말 업시 종로서에 구금되엿든 사실을 비롯하야 서울청년회와 밋 기타 단톄의 보고가 잇스려 하얏스나 그것은 그 당시마다 임의 신문지상에 보고되엿섯슴으로 특히 시간을 절약하자는 의미로 회의를 진행하야 위선 우리의 실행할 사업의 대톄 방침을 뎡할 필요가 잇슴으로 이 자리에서 발긔칙(發起側)으로부터 특별한 복안이 업는 이상에는 새로히 위원을 선뎡하야 방침에 대한 결의 초안을 작성하게 되엿는데 피선된 제씨와 결의문은 아래와 갓더라.

▲金炳魯(김병로) ▲李廷允(이정윤) ▲韓愼敎(한신교) ▲權五卨(권오설) ▲金燦(김찬)
◇决(결) 議(의) 文(문)
一(1)、우리는 言論(언론) 及(급) 集會(집회)에 對(대)한 當局(당국)의 無理(무리)한 壓迫(압박)을 鞏固(공고)한 結束(결속)으로써 積極的(적극적) 抗拒(항거)할 일.
一(2)、言論(언론) 及(급) 集會(집회)의 壓迫(압박)에 對(대)한 抗拒方法(항거방법)은 實行委員(실행위원)에게 一任(일임)할 일.

滿塲可决(만장가결)
실행위원으로
열세 명을 선거

위원의 보고가 잇슴애 만장일치로써 그 결의문 전부를 통과식힌 후에 또다시 실행위원을 선거하게 되매 선거방법에 대하야 또한 여러 가지 의론이 만앗섯스나 특히 이것은 각 방면의 사람을 망라하야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잇다 하야 좌긔 오씨의 뎐형위원을 먼저 선거하얏스며
▲李英(이영) ▲徐廷禧(서정희) ▲金炳魯(김병로) ▲辛日鎔(신일용) ▲姜宅鎭(강택진)
이 뎐형위원들의 호천(互薦)으로써 실행위원(實行委員) 십삼명을 선거한 뒤에 동 여섯시반경에 이르러 무사히 폐회하얏다는데 금번에 피선된 실행위원의 씨명과 밋 참가된 각 단톄는 다음과갓더라.

◇實行委員(실행위원)
▲徐廷禧(서정희) ▲韓愼敎(한신교) ▲李鍾天(이종천) ▲尹洪烈(윤홍렬) ▲安在鴻(안재홍) ▲李鳳洙(이봉수) ▲車相瓚(차상찬) ▲金炳魯(김병로) ▲金弼秀(김필수) ▲申明均(신명균) ▲金鳳國(김봉국) ▲李鍾麟(이종린) ▲李仁(이인)

◇參加團體(참가단체)
▲朝鮮勞農總同盟(조선노농총동맹) ▲朝鮮靑年總同盟(조선청년총동맹) ▲辯護士協會(변호사협회) ▲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동맹) ▲新思想硏究會(신사상연구회) ▲無産者同盟會(무산자동맹회) ▲開闢社(개벽사) ▲基督敎靑年會聯合會(기독교청년회연합회) ▲天道敎靑年黨社(천도교청년당사) ▲朝鮮之光社(조선지광사) ▲民友會(민우회) ▲新生活社(신생활사) ▲朝鮮女性同友會(조선여성동우회) ▲勞働大會(노동대회) ▲勞働共濟會(노동공제회) ▲朝鮮敎育協會(조선교육협회) ▲朝鮮女子靑年會(조선여자청년회) ▲朝鮮學生會(조선학생회) ▲佛敎靑年會(불교청년회) ▲天道敎維新靑年會(천도교유신청년회) ▲焰群社(염군사) ▲苦學生갈돕會(고학생갈돕회) ▲女子苦學生相助會(여자고학생상조회) ▲建設社(건설사) ▲民衆社(민중사) ▲朝鮮經濟會(조선경제회) ▲女子敎育協會(여자교육협회) ▲衡平社革新同盟(형평사혁신동맹) ▲時代日報社(시대일보사) ▲朝鮮日報社(조선일보사)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

현대문
니주바시 폭탄범인은
의열단원 김지섭
9월 1일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 도화선 돼
일본 전체를 경악하게 한 대사건 발표

올해 1월 5일 오후 7시에 도쿄 니주바시 앞에서 돌발한 폭탄사건은 일본 전체를 경악하게 만든 대사건으로 당국에서 신문 게재를 일절 금지하고 이후 도쿄지방재판소의 이시다 검사와 히라야마 예심판사의 손으로 수사를 진행하던 중 며칠 전 예심이 결정되고 전날 오후 2시에 당국의 보도허가 통지가 나와 피고 김지섭 외 4명은 모두 유죄로 공판에 넘긴 예심결정서대로 보도한다.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상미동
김지섭(40)
원적 사가현(당시 상하이 거주) 무직 원동경정진회원(출판종업원조합) 원동경모신문기자
히데시마 고지(33)
나가사키현 미나미다카키군 구치쓰무촌 당시 상하이 거주 이발소 직원
고바야시 히라키(20)
상동 선원
구로시마 리케이(31)
상동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23)
위 김지섭, 히데시마 고지, 고바야시 히라키는 폭발물단속벌칙 위반과 선박침입죄, 구로시마 리케이, 고바야시 간이치는 선박침입방조죄이며 범죄사실은 아래와 같다.

극동민족대회에서
직접 행동을 결의했다

김지섭은 1922년 여름에 상하이 의열단에 가맹해 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극히 과격한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계획했다. 군자금이 부족하여 뜻대로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이때 러시아공산당이 조선인에게 대대적으로 적화운동을 시작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공명해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라는 두 단체가 조직되었다. 한족공산당이 러시아공산당으로부터 수십만 원의 적화선전비를 받아서 단원 중 김립이 그 대부분을 썼으므로 러시아공산당은 그 후 선전비를 내주지 않았다. 그해 11월경에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려 조선인도 다수 참석하고 김지섭도 참석해 “극동민족은 아직 유치해 언론과 문장을 가지고는 각성시킬 수 없다. 차라리 관공서를 파괴하고 중요한 고위 관리를 암살해 민족을 각성시키고 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를 선전”한다는 뜻을 결의했다.

경성 실패를 거울 삼아
도쿄에서 파괴행동을 꾸며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1922년 4월경 고려공산당원이자 의열단원인 장건상이 상해에 돌아오자 김지섭은 그와 상의하고 러시아공산당의 뜻을 받아 막대한 선전비를 얻으려고 그 해에 우선 조선 안에서 파괴적 사업을 수행하고자 그 해 11월경으로부터 계획 중이었다. 그런데 필경 조선 내지에 폭탄을 수입할 것을 계획하고 1923년 3월경에 조그맣게 생긴 폭탄 30개(살인용), 크게 생긴 폭탄 6개(가옥 파괴용)를 상하이에서 톈진으로 수송했다. 단둥현과 신의주 사이에 국경 경비가 아주 엄격해 쉽게 조선 내지로 수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둥현에 중계소를 만들고 당시 경기도경찰부 경부 황옥을 중간에 넣어 먼저 동지 김시현 유석현 등과 함께 신의주에서 두어 명의 기생을 불러서 유흥을 한 후 그 폭탄의 일부를 기생이 돌아가는 길에 인력거 속에 감춰 국경 경비를 돌파해 신의주에 들여오고 폭탄 일부는 황옥 자신이 휴대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3월 15일에 기어이 일을 시작하려다 발각되어 황옥 등 13명은 붙잡혀 계획은 드디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김지섭은 김원봉 장건상과 함께 도망해 상하이로 가서 이번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분하게 여겨 차라리 일본제국주의의 수도에서 그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미쓰이상선에 숨어
10일 만에 일본에 도착
일본인으로 이름을 바꾼 뒤

마침 9월 1일에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학상당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분함을 이기지 못해 김자영 김옥 외 명의 동지와 결사대를 조직했다. 김지섭은 의열단 특파원으로 선발하게 되어 의열단 기밀부로부터 여비 100원을 받아 당시 상하이에서 러시아공산당과 상하이공산당 간의 연락을 맡고 있는 히데시마 고지와 이발소 직원 고바야시 히라키 2명과 상의하고 미쓰이물산회사에서 쓰는 석탄 운수선 아마기마루의 선원 구로시마 리케이, 고바야시 간이치(고바야시 히라키의 형) 등에게 일본으로부터 코카인 아편을 중국에 밀수입하면 막대한 이익이 있을 테니 그 이익을 분배하자고 속였다. 작은 폭탄 3개와 일본 관헌이 수상하게 여길 때의 대비로 나카무라 히코타로라는 가짜이름으로 된 명함 30장을 지니고 고바야시 히라키와 함께 12월 20일 밤 상하이에서 아마키마루를 타고 창고에 숨어 있었다. 그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오기 때문에 대략 10일을 지나서 그달 30일에 일본 후쿠오카현 야하타제철소의 안벽에 도착해 김지섭은 깊은 밤에 몰래 상륙해 그 곳 여관 히젠야에 투숙하고 1월 3일까지 그 여관에 묵다가 100원의 여비는 선원 등에게 주었다.

여비 부족으로
회중시계를 저당해

남은 돈이 없어서 숙박요금을 지불하기가 어렵게 됐기 때문에 구로시마에게 의뢰해 회중시계와 덥고 자던 담요를 저당잡혀 숙박요금을 지불하고 3일 밤 그 곳을 출발해 5일 아침 시나가와역에 도착했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조선학생으로부터 다카다바가역 근처 하숙집 신세츠칸에는 조선학생이 많이 묵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시나가와역에서 쇼센전차를 갈아타고 다카다바가역에서 내려 신세츠칸에 갔지만 숙박이 거절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근처 여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곧 그 집에서 나왔다.

고위 관리 암살은
의회 휴회로
못하게 된 뒤

김지섭은 일본에 상륙하자 당시 제국의회 개회 중에 조선총독을 비롯해 중요한 고위 관리들이 의회에 출석했기 때문에 방청석에서 의장에 폭탄을 던져 단번에 당국의 고위 관리와 많은 의원을 몰살하려고 결의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신문에 의회는 휴회되고 언제 열릴지 알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니주바시에 폭탄투척 결의
도쿄 지도를 사기지고 획책

이렇게 되고 보면 일본인이 숭배하는 황성 부근에서 폭탄을 던져 관민을 놀라게 해 울적한 분노를 풀겠노라 생각했다. 그날 도쿄시의 지도를 사서 히비야 니주바시 우메다몬 부근을 돌아다니다 니주바시가 황성정문인 줄을 확실히 알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마침 지나가는 구경꾼 두 사람과 동행인 듯이 행동해 니주바시에 가까이 갔다.

우선 순사에게
하나를 던져

순사가 누구냐고 물었기 때문에 순사를 향해 폭탄 한 개를 던졌는데 뇌관이 발화했을 뿐 도화선이 고장 나 터지지 않았다. 김지섭은 지체하지 않고 순사를 떠밀고 다리 가운데까지 돌진했으나 드디어 위병에게 잡혔으므로 엄중한 취조를 받아 모두 자백하고 다른 4명도 상하이 혹은 일본에 숨어 있다 체포된 것이다. 붙잡혔을 때 김지섭은 돈 3전과 앞서의 명함을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김자영도
유죄 결정

상하이에 거주하는 의열단 간부(현재 도주 중) 김자영은 히데시마 고지의 선배로 김지섭의 부탁을 받고 히데시마와 고바야시에게 부탁해 김지섭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편의를 주고 부두까지 전송했으므로 폭발물단속규칙위반과 잠복침입방조죄로 유죄로 결정됐다.

처참한 현장 모습
당일 밤에 생긴 모든 현상

당일 현장의 광경을 보면 그날 오후 6시부터 궁성 니주바시 부근으로 돌아다니는 남자 3명이 있었는데 밤이 되도 어디로 가지 않으므로 부근을 경계하던 경관은 밤이 되면 관광을 할 수가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3명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났으나 그 중 1명은 그 후 다시 니주바시로 와서 여기저기로 거닐게 됐다. 그는 24, 25세가량 되는 청년으로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오버코트를 입었으며 그의 행동이 매우 수상해 니주바시를 경계하던 히비야 경찰서 순사 오카모토 시게에이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니주바시 중앙으로 벼락같이 뛰어 들어가 문간을 지키던 근위 보초는 총을 겨누고 길을 막으며 그가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보초 한 명과 순사의 지원을 받아 그 자를 체포한 뒤 니주바시 밖으로 끌어냈다. 그 때 다리 위에 폭탄 2개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으나 그는 순사와 보초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격투를 하며 또 1개의 폭탄을 다리 중앙에 내던졌다. 그때 폭탄은 권총을 발사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터졌으나 순사와 보초는 권총을 발사했나보다 생각하고 그를 히비야 경찰서로 끌고 갔다. 사법성에서는 스즈키 검사총장 이하 검사정과 예심판사, 검사가 히비야 경찰서로 나와 엄중한 취조를 개시한 결과 그는 그날 밤에 폭탄으로 니주바시를 파괴하고 혼잡한 틈을 타서 궁성 안에 침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생기자 당시 기요우라는 내각조직을 중지하고 근신하고 있던 야마모토 내각은 긴급각의를 열었고 신문기자가 탄 수십 대의 자동차는 동분서주해 매우 소란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유교교육에서 사회주의자로

폭탄범인 김지섭은 단기 4218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교교육을 받아 사서삼경을 뗐고 최근에 이르러는 사회주의사상에 공명해 현재의 모든 제도를 부인하는 급진적 사회주의를 주창하게 됐다.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하며 다녔고 일찍이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으며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도 출석했다. 그의 얼굴은 꾹 다문 입, 많지 않은 윗수염, 시력 강한 눈,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최근에 읊은 시 2수
이번 이동 중에

김지섭이 이번에 뜻을 결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에 그의 친구 모에게 보낸 시 몇 수를 소개하면
신춘시(이번에 일본 갈 때)
한바탕 굼같은 인간세상 마흔 살 먹은 사람
송문에 비 지나자 봄바람 크게 부네
가련타 오늘밤 새해를 맞이하는 느낌은
필경에는 천만 사람이 다 다르겠지

재선 중(이번에 일본 갈 때)
만 리 둥실 떠가는 한 톨 같은 몸이여
배 안엔 모두 적이니 뉘라서 친할까
장량의 철퇴 형가의 검을 가슴에 품은 지 오래고
노중련의 바다 굴원의 상수를 꿈에 뛰어들길 자주 했네
지금 마음 썩이며 물에 잠긴 나그네는
그 옛날 와신상담하는 사람과 같네
이번 길에 이미 평소의 뜻을 결심했으니
관문을 향해 다시는 나루터 묻지 않으리

폭탄 3발이
다 안 터졌다
황궁서장의 말

이에 대해 이치무라 황궁경찰부장의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나는 5일 밤 7시가 지나 황궁경찰부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왔으므로 현장의 광경은 보지 못했다. 사실인즉 나이 40세가량 되는 사람이 니주바시 부근을 돌아다니므로 히비야 순사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몸에서 폭탄을 꺼내 순사를 겨누고 던졌으나 그 폭탄은 니주바시 가운데 떨어져 폭발되지는 않았다. 그때 근위 제1연대 제11중대 일등병사 호소이 기요시는 그 광경을 보고 그를 향해 총을 겨눈즉 그는 다시 두 번째 폭탄을 던졌으나 그 폭탄은 정문 석책 위에 떨어지며 역시 터지지 않았다. 그 보초병은 그를 다리 난간 위에서 붙잡았고 그는 세 번째로 다시 폭탄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터지지 않았는데 그때 근위보초병 가와하라 쵸지로는 수위대본부에 경보를 발령해 3, 4명의 보초병이 달려와서 겨우 그를 붙잡아 히비야 경찰서에 끌고 간 것이다.

※기사 속 한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