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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에 젖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100〉

입력 | 2021-03-19 03:00:00


좋은 비 때를 아는 듯 봄 되자 천지에 생기를 주네.

바람 타고 몰래 밤에 찾아와 부슬부슬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들길은 온통 구름으로 캄캄하고 강에 뜬 고깃배 불빛만 환하다.

새벽이면 붉게 젖은 곳 보게 되리니, 꽃들이 금관성에 흐드러져 있을 테지.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野徑雲俱黑, 江船火燭明. 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반가운 봄밤의 비(춘야희우·春夜喜雨)’ 두보(杜甫·712∼770)


여름비는 지루한 장마를 연상케 하고 가을비는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우니 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 봄비가 제격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는 봄비에 젖으며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마침맞게 내려와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봄비를 시인은 ‘호우(好雨)’라 이름 지었다.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다. 날이 밝으면 성안에 붉은 꽃들이 촉촉이 만개하리라는 기대 속에 가만히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 설렘으로 잠이라도 설친 것인가. 사립문 너머로 강 위에 뜬 배의 불빛만 반짝일 뿐 먹구름이 드리운 들길은 칠흑처럼 어둡다. 단비 세례가 쉬 멈출 것 같지 않은 반가운 예감으로 더 마음 달뜨는 봄밤이다. 단비와 붉은 꽃을 통해 자연이 주는 생기와 윤기를 한껏 과장하고픈 봄밤이다. 이 경쾌한 분위기는 암울한 현실에 비분강개하고 굴곡진 삶에 의기소침했던 두보 시 특유의 비장미와는 전혀 딴판이다.

당시 시인은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외곽에 초당을 마련하고 있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한 직후였다. 이리도 봄비를 고대한 만큼이나 농사에도 관심이 많아 인근 지역 관리들에게 복숭아나무, 대나무, 자두나무, 소나무 등 묘목을 요청하는 시를 연거푸 보내던 시기였다. 1년 전만 해도 야생 토란을 캐겠다고 ‘종아리도 덮지 못하는 짧은 옷을 당겨가며 눈 덮인 산’을 헤매던 그였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