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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편혜영표 서스펜스를 읽다

입력 | 2021-03-20 03:00:00

◇어쩌면 스무 번/편혜영 지음/232쪽·1만3500원·문학동네




치매를 앓는 아버지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딸, 옥수수 밭 한가운데의 집으로 찾아와 계약을 강요하는 보안업체 직원들. 이들이 지키려는 건 약속대로 상대방의 재산과 목숨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독자들은 편혜영의 신작에서 이 석연찮은 관계를 바라보며 불편함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여섯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각 작품에서 인물들은 모두 현재 머물던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공간은 소도시나 시골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소에서 이들은 고립과 위협에 시달린다. 몰아치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쌓아가고 어느새 독자를 서늘한 진실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편혜영표 서스펜스’가 펼쳐진다.

단편 ‘호텔 창문’에선 죄 없는 죄의식을 그렸다. 주인공 ‘운오’는 물에 빠진 자신을 살리다가 목숨을 잃은 사촌형으로부터 19년째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사촌형의 기일을 맞아 찾아간 큰아버지 집에서 운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자책의 유혹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단편 ‘리코더’에선 어떤 감정을 떨쳐낼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빚더미에 앉은 ‘무영’이 고등학교 동창 ‘수오’의 집에 얹혀살게 된 지 얼마 안 돼 수오가 증발하듯 사라진다. 이 두 사람은 고교 시절 수련장 붕괴 사고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생존자들. 수오의 실종을 뒤쫓는 과정에서 무영은 수오가 사고 후 지금까지 자신과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물기 어린 시선을 이 작품에선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홀리데이 홈’ ‘플리즈 콜 미’ ‘후견’ 등 이어지는 단편들에서 작가는 한층 더 깊고 치밀해진 시선을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걸 알 것 같다”고 썼다. 작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결말이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