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백신접종 증명서’ 도입 잰걸음
동시에 불평등 심화, 개인정보 침해, 효용성 한계 등 백신 여권이 초래할 부작용에 대한 우려 또한 높아지고 있다. 특정 국가나 단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국제 기준 설정 등을 위한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 “일부 집단 위한 특권” vs “빨리 일상 회복해야”
중국 정부는 정보기술(IT) 공룡 텐센트와 협력해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용 ‘국제여행 건강증명서’를 출시했다. 이스라엘은 2월부터 2차 접종을 마친 시민에게 ‘녹색 여권’을 발급하고 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백신 2차 접종을 완료한 사람에게 2주 후 증명서를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IBM, SAP 등도 백신 증명서 제작에 나섰다.
반면 백신 확보에 뒤처진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국가에 백신 여권은 ‘그림의 떡’으로 여겨진다. 17일 기준 세계 2, 3위 감염국인 브라질과 인도의 백신 접종률은 각각 1.41%, 0.45%에 불과하다. 백신 여권에 따른 ‘이동 자유권’이 소수의 조기 접종국 국민만 누릴 수 있는 특혜인 셈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8일 “백신 여권은 특정한 이유로 백신 접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불공평하다. 현 체제의 불평등과 불공정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 것도 맥을 같이한다.
강대국 내 불평등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멀린다 밀스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과학센터 소장은 2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에 임산부와 알레르기 질환자 등 의료적 이유로 백신 접종을 제한받는 집단, 종교 때문에 백신 접종을 꺼리는 특정 종교의 신도 등이 해당 사회에서 차별받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독일윤리협회 역시 최근 성명을 통해 “백신 여권이 없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겪을 사회적 낙인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여권, 출생증명서 같은 신분증이 없거나 디지털 백신 여권을 내려받을 스마트폰 등 전자 기기를 살 수 없는 수십억 명에 대한 불평등이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엔과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세계 인구는 약 36억 명에 달한다. 이와 별도로 11억 명 이상이 신원 증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EU는 당초 그린패스의 명칭을 ‘디지털 백신 여권’으로 명명하고 3개월 안에 체계 구축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 우려가 제기되자 ‘여권(passport)’ 대신 ‘패스(pass)’란 이름을 택했다. 백신을 맞지 않았더라도 음성 판정을 받았거나 코로나19에 걸렸다 회복된 사람에게도 증명서를 내주는 방안 또한 검토하고 있다.
○ ‘디지털 빅브러더’ 논란
지금까지 출시된 백신 여권은 모두 QR코드가 찍힌 디지털 형식이다. 종이 여권보다 항공기 탑승권(보딩패스)과 유사한 형태다. 전 세계 290여 개 항공사를 소속사로 둔 IATA 역시 이달 말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스마트폰 앱 ‘IATA 트래블패스’를 출시한다. 각 방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백신 접종 여부는 물론이고 코로나19 검사 결과, 혈액형, 체온, 바이러스 노출 위험도 등 다양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종이문서 대신 전자문서 형식을 채택한 이유는 편리함 때문이다. QR코드 하나로 모든 정보를 관리할 수 있어 데이터 관리가 쉽고 출입국 심사 시간도 줄어든다.
문제는 이와 동시에 개인정보 유출 위험 또한 늘어난다는 데 있다. 미 블룸버그뉴스는 백신 여권 도입에 따른 ‘디지털 독재(Digital Dictatorship)’ 공포가 커지고 있다며 백신 여권 개발에 나선 대형 IT 기업이 ‘정부 돈’과 ‘소비자 개인정보’를 동시에 얻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로부터는 백신 여권 개발 대가로 막대한 돈을 지급받고, 여권을 발급한 개개인의 신원, 의료, 여행 정보 등을 고스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 공연장, 숙박시설, 해외 방문 등에 백신 여권을 쓰기 시작하면 사실상 개개인의 사생활 추적이 가능해진다.
정보 전문가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백신 여권 개발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캐나다 블록체인 전문기업 에버님의 드러먼드 리드 최고신뢰책임자는 NYT에 “전 세계가 여권 체계를 구축하는 데 50년이 걸렸다. 또 지문 등 생체정보 활용 체계를 도입하는 데도 10년이 넘는 논의 기간이 필요했다”며 코로나19 백신 여권이 전염병 대유행(팬데믹) 이후 1년이라는 굉장히 짧은 시간 내 추진되고 있는 만큼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생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제니 왱거 리눅스재단 프로그램 책임자 역시 NYT에 “특정 정부나 기업이 음지에서 데이터를 독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도록 모든 앱의 소프트웨어는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오픈소스 형태여야 한다. 잘못하면 우리가 ‘기술 디스토피아’에서 살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여권 효용성 논란도 심화
의료 전문가들은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 미국 모더나,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등 주요 백신의 항체 기간이 약 6개월 내외일 것으로 보고 있다. 6개월마다 새 여권을 만들지에 관한 국제 기준 등이 정립되지 않았고 일부 접종자의 항체가 이보다 짧게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백신 여권이 있다고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스라엘은 ‘녹색 여권’의 유효 기간을 6개월로 설정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방역 책임자인 나흐만 아시 교수조차 15일 “백신 효능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데이터 연동을 통해 국가 간 통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세계가 동일한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일반 여권과 달리 백신 여권은 제작 주체별로 기능 및 작동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등 서구 의료 전문가가 불신하는 국가의 백신 효능을 믿어도 되느냐는 문제도 있다. 중국 국영 제약사 시노백, 러시아 정부가 개발한 스푸트니크V 백신 등을 맞은 사람들의 백신 여권을 화이자, 모더나 등 서구 제약사가 개발한 백신을 맞은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의미다. 올해 1월 18일부터 시노백에서 제조한 ‘코로나백’ 백신 접종을 시작한 브라질에서는 변이 바이러스가 또다시 기승을 부려 중국산 백신 효력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브라질, 영국, 미국 연구진들이 5개월 전 시노백 백신을 투여한 8명의 혈장을 분석한 결과 해당 백신은 브라질발(發)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 효과가 없었다.
국내 의료 전문가 또한 비슷한 우려를 제기했다. 김우주 고려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는 “황열병은 백신 효과가 100%에 달하기에 황열병 접종 증명서, 즉 ‘옐로 페이퍼’를 면역 인증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코로나19 백신은 아직 그 효과를 100% 확신할 수 없다. 변이 바이러스라는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백신 여권 도입 이전에 최대한 많은 백신을 확보해 신속하게 접종을 진행하고 집단면역부터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집단면역에 근접한 국가들끼리 백신 여권을 인증해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지면 면역 수준에 따라 새로운 경제블록이 탄생할 수 있다며 세계적 흐름에 지나치게 뒤처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나라들은 막대한 경제적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최근 주변국에 “백신 접종 상호 인증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 역시 글로벌 백신 표준 및 플랫폼화를 중국이 주도하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상원 중앙방역대책본부 역학조사분석단장은 17일 기자회견에서 “한국도 백신 여권을 검토하고 있다. 과학적 근거와 세계적 추세를 반영해 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알레르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언제까지 전 세계를 터널 속에 가둬 놓을 수는 없다”며 “다른 국가가 시행하면 우리도 상호 원칙에 의해 함께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아형 abro@donga.com·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