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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종석]5346일 버틴 약자의 ‘역주행’

입력 | 2021-03-22 03:00:00

‘7전 8기 우승’ 여자농구 삼성생명
‘돈=성적’ 통념 깨뜨린 반란에 열광




김종석 스포츠부장

5346일.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이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안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2006년 7월 27일 이후 올해 3월 15일 정상에 복귀했다. 당초 이런 예상은 드물었다. 정규리그에서 반타작도 못하며 4위로 플레이오프에 막차 탑승했다. 4강전에서 1위 우리은행을 누른 뒤 챔피언결정전에서 2위 KB스타즈를 제압했다. 4위 팀 우승도, 승률 5할 미만 팀 우승도 처음이다.

삼성생명의 선수 평균 연봉은 7100만 원. 6개 전체 구단 가운데 가장 낮다. 1위는 우리은행(1억 원). 샐러리캡(연봉총액상한) 소진율은 81.4%로 최하다. 슈퍼스타 한 명 없어도 똘똘 뭉쳐 최우수 성적표를 받았다.

팀 내 최고령인 35세 동갑내기 김보미와 김한별이 앞장을 섰다. 김보미는 현역 선수 최다인 5차례나 팀을 옮겼다. 마지막 둥지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낸 뒤 눈물을 쏟았다. 김한별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이라는 거대한 상대와도 싸웠다. 엄마의 나라에서 농구하고 싶어 삼성생명에 입단했지만 적응 실패에 부상까지 겹쳐 2014년 은퇴했다. 이듬해 임근배 감독의 권유로 컴백해 최우수선수의 영광을 안았다. 배혜윤은 우리은행에서 임의탈퇴 선수로 운동을 관두려다 이적해 주장까지 맡아 꽃을 피웠다. 윤예빈은 고교 시절 무릎수술 실패로 프로 입단 후 2년 동안 치료만 하다 뒤늦게 특급 조연이 됐다.

임근배 감독은 학창 시절 농구 엘리트 코스와 거리가 멀었다. 은퇴 후 최고 지략가 유재학 감독 밑에서 10년 넘게 코치로 일하며 리더십과 전술을 배웠다. 현대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20년 가까이 잔뼈가 굵은 임 감독이 삼성에서 헹가래를 받은 것은 순혈주의가 강조되던 과거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1978년 창단한 삼성생명은 수십 년간 최고의 명문 구단이었다. 당대 최고 스타들이 천문학적인 몸값에 파격적인 지원을 받는 금수저 군단으로 유명했다. 그런 팀의 선수 연봉이 최하라니.

국내 프로 구단은 모기업 의존도가 심하다. 불황에는 운동부 예산부터 줄이는 게 현실이다. 모기업이 재채기를 하면 구단은 감기에 걸린다. 삼성이 운영하는 5개 프로 구단(야구, 축구, 남녀농구, 배구)은 한때 유망주 싹쓸이 등으로 우승을 밥 먹듯 해 스포츠까지 ‘삼성 공화국’이냐는 원성을 산 적도 있다.

이젠 달라졌다. 2014년을 기점으로 삼성 프로 구단이 제일기획 소속으로 통합되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 공교롭게도 삼성 프로팀의 리그 우승은 2014년 야구 한국시리즈 이후 지난해까지 전무했다. 배구 최강이던 삼성화재는 이번 시즌 첫 최하위. 곳간이 비기 시작하면서 삼성 구단들은 절박하게 생존에 매달렸다. 선수 보강과 육성에 저비용 고효율을 강조했고, 자생력을 키우려고 스폰서 영입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과거 풍족하던 시절 삼성 계열 한 구단 단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유명 치킨업체의 후원 제안을 거절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요즘 그 팀 유니폼은 마치 광고판처럼 각종 기업의 로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흔히 프로 스포츠는 ‘돈=성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절대 강자나 거대 자본을 앞세운 ‘악의 제국’이 독식하는 무대에 희열을 느끼긴 어렵다. 무적처럼 보이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언더도그(약자)에 열광한다. 스포츠에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15년 동안 준우승만 7번 했던 삼성생명의 ‘7전 8기’가 코트 밖에서도 깊은 울림을 전하기를.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