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신라 예술혼이 담긴 그릇, 금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1-03-23 03:00:00


5세기 후반 신라 왕비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191호·왼쪽 사진)과 6세기 신라 왕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은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무겁다. 이한상 교수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21년 9월, 경주에서 신라 역사의 결정적 단서가 드러났다. 노서리 한 식당 뒤뜰에서 건물 터 파기 공사를 하다 금관, 금귀걸이, 금허리띠 등 황금 유물을 대거 발견한 것이다. 특히 금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하고 화려했다. 역사기록에만 전해 오던 ‘눈부신 황금의 나라’ 신라의 예술이 마침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이 무덤은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마터면 금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영영 사라질 뻔했다. 집주인과 공사 관계자들이 땅속에서 노출된 황금유물을 보고 신고를 망설이고 있을 때, 경주경찰서 순사가 들이닥쳤고 긴급 발굴로 이어졌다. 당시 많지 않던 고고학자들이 양산에서 발굴 중이었다. 그들 대신 비전문가들이 고구마 캐듯 유물을 수습해버렸다.


○ 금관을 찾아라!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자 조선총독부는 금관을 추가로 더 찾으려 했다. 1924년 총독부박물관은 금관총 주변에서 폐고분 두 기를 발굴했고, 그 가운데 한 기에서 또 하나의 금관을 찾아냈다. 금관총 금관보다 크기가 조금 작고 장식도 간소한 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 금관이다.

2년 뒤 서봉총 금관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는 사연이 있다. 철도국이 경주역 기관차고 신축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다 다수의 신라 고분을 훼손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철도국은 박물관과 협의하여 폐고분 한 기를 발굴하기로 했다. 철도국 예산으로 발굴하고 그 부산물로 나오는 자갈과 흙을 공사현장에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들이 발굴 대상으로 점찍은 것은 금관총에 이웃한 폐고분이었다. 예상대로 금관총 출토품에 버금가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광복 이후 두 점의 금관이 더 발굴됐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자 대통령은 신라 고분 발굴을 지시했다. 그에 따라 발굴이 시작됐고 1973년에는 천마총, 1975년에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연이어 금관이 출토됐다. 다만 당초 금관 발굴이 유력해 보였던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발굴단을 당혹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현지를 찾은 대통령의 불호령을 염려하였으나 무사히 지나가 안도하는 일도 있었다.


○ 반출 위기를 넘은 금관

금령총 금관드리개의 세부 모습. 이한상 교수 제공 


신라 유물 가운데 금관은 발굴 당시부터 워낙 잘 알려져 훔치려는 시도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금관총 금관 절도 미수사건이다. 1927년 11월 10일 밤, 금관이 보관되어 있던 경주박물관 금관고에 도둑이 들어 금허리띠와 유리목걸이를 훔쳐 달아났다. 금관까지 손을 대려 했으나 전시장 문이 열리지 않아 포기했다. 경찰이 대대적 수사를 벌였지만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였고 이듬해 수사망이 좁혀오자 범인은 경찰서장 관사 앞에 유물이 담긴 보자기를 슬며시 내려놓고 사라졌다.

서봉총 금관은 1935년 평양박물관 전시회에 출품됐다. 이 전시회가 끝난 후 당시 박물관장이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파티를 열고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채 사진을 찍어 공분을 샀다. 1949년 5월에는 국립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서봉총 금관을 훔쳐 달아났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금관이 일본으로 반출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세 점의 금관 모두 국내에 남았다. 신라의 지방인 양산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신발 등 유물은 보고서 작성을 빌미로 일본으로 반출되어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조선고적연구회가 발굴한 유물 가운데 상당수는 ‘학술연구’라는 명목으로 반출되었으며 대부분 소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금관이 반출되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 하겠다.


○ 금관은 왕관이었을까?

금관은 발굴 이래 오랫동안 신라의 왕관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최종규 학예관은 금관이 장례용품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특이한 모습 때문이었다. 즉, 금관이 마치 데스마스크처럼 망자의 머리 전체에 씌워진 채 발견되었음을 상기시켰다.

1990년 후반 경주박물관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금관을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금관을 전시장 밖으로 옮겨보려 애를 써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금관의 금판이 너무 얇아 자꾸 휘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취약한 금관을 실제 신라왕이 썼을지 의문이 생겼다. 또한 금관에 조각된 무늬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제작과정에서 장인이 실수했을 법한 흔적을 금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었다. 신라왕이 생전에 이 금관을 보았다면 장인에게 경을 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관에 대한 호기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한동안 금관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그 결과 금관 소유자 가운데는 성인 남성도 있지만 성인 여성, 소년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금관은 신라왕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라왕의 직계가족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었던 것이다.

금관총 금관이 발굴된 지 한 세기가 다 되었지만 여전히 금관의 비밀은 다 풀리지 않았다. 신라 금관은 세계의 다른 금관에 비해 장중함이나 신비로움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아직 이와 유사한 금관이 다른 나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으므로 이 금관은 신라인이 그들의 예술혼을 오롯이 담아 만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왜 그런 형태의 금관을 만들어 망자의 머리 전체에 씌워주었는지, 금관에 주렁주렁 매달린 곡옥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왜 6세기 중엽 이후 금관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등 아직도 우리가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가 여전히 쌓여 있다. 장차 관련 연구를 통해 그런 비밀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 금관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깊어지길 소망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