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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안철수의 길, 료마의 길

입력 | 2021-03-24 03:00:00

국민의힘 오세훈 단일화 승리, 안철수로서는 결정적 패배
사쓰마 조슈 통합한 료마처럼 반문진영 연대에 헌신하는 게
남겨진 안철수의 소명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내 사무실에는 안철수 씨의 미니어처 조각상이 하나 있다. 방송용으로 제작해 쓰던 것을 하나 구해 갖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안철수 씨를 지지했다. 당시 보수정당의 대선주자는 박근혜 씨였다. 하지만 박 씨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그가 박정희 딸이라는 사실 말고는 대선후보가 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박정희 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최순실과의 관계 때문에 몰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권력을 주고받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평소 지지하는 정당 못지않게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는 상대편 정당이 신뢰할 만하냐가 중요하다. 당시 진보 진영에는 안 씨와 문재인 씨가 단일화를 두고 맞붙었다. 문 씨는 1980년대 운동권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고 안 씨는 1980년대 학생 대중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안 씨라면 진보 진영의 후보가 되더라도 믿고 정권을 맡길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안 씨는 단일화에서 져 진보 진영의 재편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 씨는 단일화에서는 이겼으나 박근혜에게 패해 거의 몰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박근혜 탄핵을 기회로 집권까지 했다. 운 좋게 집권한 것을 실력으로 집권한 것으로 착각한 문재인 정권은 곧 본색(本色)과 무능(無能)을 드러냈다. 문재인파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됐고 반문(反文)진영이 형성됐다. 안 씨가 이번에는 반문진영의 단일화 주자로 등장했다. 10년 만의 반전이다.

안 씨는 어제 다시 결정적으로 패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서울시장으로 다시 시작해 그 성과로 2027년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안 씨로서는 실망스러운 결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반문진영 전체로 보면 안 씨가 꼭 이겨야 할 이유는 없다. 안 씨가 되든 오세훈 씨가 되든 양쪽 다 최선을 다하면 야당 후보에 승산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안 씨의 목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서울시장이 아니지 않은가. 안 씨의 패배는 어쩌면 다시 대선에 도전해 볼 기회가 될 수 있다.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면 이번에는 아예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안 씨에게 다시 대선에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2011년 박원순 씨와의 서울시장 단일화에서 양보하고 대선에 도전했다가 10년간의 긴 우회 끝에 다시 서울시장 후보로 도전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한계인 면도 있고 한국 정치의 한계인 면도 있다. 이쯤에서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낫겠다.

그 대신 료마의 길을 권하고 싶다. 일본 메이지유신 때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쓰마번 출신도 조슈번 출신도 아니면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통합을 이끌어 일본의 근대화를 이뤘다. 안 씨가 단일화에서 이긴 오세훈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도록 성심성의껏 돕고 이후에는 반문진영에서 국민의힘과 강력한 대선 주자로 부각된 윤석열 씨를 결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금 한국 정치에 무엇보다 기여하는 길이다.

안 씨는 의사로서 또 벤처기업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지만 기존의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서 새로운 정치적 소명을 발견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안 씨는 권력을 잡아 휘두르는 데서 희열을 느끼거나 권력의 전리품을 측근들에게 나눠주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다. 권력지향적인 정치인과 다른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앞에 놓여 있다.

반문진영의 유력한 후보가 드문 상황에서 안 씨가 2선에 위치한다면 반문진영에는 든든한 느낌을 주고 정치 전반에는 활력을 준다. 보수 정당 출신의 문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뒤져보면 구린 데가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오 씨가 지금 제기되고 있는 서울 내곡동 셀프특혜 의혹을 얼마나 잘 해소할지 의문이다. 윤 씨는 지지율이 높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 검찰주의자는 여전히 많은 불안한 점을 갖고 있다. 안 씨가 희생적 자세로 자기 소명을 다하다 보면 지나가버린 별의 시간이 혜성처럼 다시 올지 누가 알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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