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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춤출 것이다” 팬데믹 이후 준비하는 뉴욕 예술가들

입력 | 2021-03-25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미국 뉴욕시의 오픈 컬처 프로그램 시작을 알리는 홍보 사진.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17일(현지 시간) 저녁 미국 뉴저지주 엥글우드클리프스 지역의 한 스튜디오에서는 클래식 명곡이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오페라 명곡인 ‘로미오와 줄리엣’ 중 ‘나는 꿈속에 살고 싶어요’.그녀와 피아노 반주자 앞에는 관객 없이 녹화 장비만 썰렁하게 놓여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무대 음향기기로 ‘오케이’ 사인이 들리고 스태프 몇 명만 박수를 보냈다.》


이날의 ‘공연’은 뉴욕시 일원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 비영리단체 이노비(EnoB)가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원들과 마련한 봉사의 자리였다. 이들의 라이브 공연을 녹화해 그 파일을 인근 병원이나 요양시설 등에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이날 노래를 부른 앤 노너매커 씨는 “20년 동안 오페라 단원 생활을 했는데 지난 1년은 관객 앞에서 공연을 거의 하지 못했다”며 “이런 기회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공연이 끝나자 베이스 세스 맬킨 씨가 단상에 올라 브람스의 ‘사포의 송가’와 프랑스 가곡 등을 불렀다. 2005년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단원으로 활동해 왔다는 그도 “지난 1년은 너무 힘들었고 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맬킨 씨는 “공연을 못 하는 기간에는 기타를 메고 브로드웨이나 센트럴파크에서 버스킹도 했다”며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고, 언제 다시 공연장에 설지 몰라서 나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1년간 세계 문화의 중심 도시인 뉴욕의 공연예술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공연장이 문을 닫으며 수입이 끊긴 맬킨 씨도 온라인 레슨 수입과 정부의 실업급여로 근근이 버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팬데믹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공연 중단… 최대 고용충격

12일 낮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빌리지. 이 지역의 한 낡은 건물 1층에는 ‘예술가를 위한 공간(Space for Artists)’이라고 적힌 검은색 간판이 달려 있었다. 건물 벽면에 낙서와 그라피티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어 자칫 버려진 공간으로 착각하기 쉬운 이곳은 실은 화가들이 무료로 작품 전시를 할 수 있게 꾸며진 곳이었다.

큐레이터인 캐럴 워드 씨는 “여기는 원래 가게가 있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워드 씨는 “우리가 어떤 전시를 하고 싶다고 제안을 하면 그걸 보고 차샤마(ChaShaMa)라는 뉴욕의 비영리단체가 전시 공간을 구해 연결해 준다”며 “부동산 소유주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들은 이곳을 무료로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입자들이 빠져나가 빈 점포가 된 곳을 부동산업자들이 예술가들에게 전시 공간으로 쓰게끔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시 공간에 대한 수요는 예술가들의 생계가 어려워진 요즘 부쩍 늘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문을 닫는 가게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빈 점포 또한 늘었다. 아이로니컬하지만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이들에게는 기회로도 작용하게 된 것이다. 차샤마를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전시 공간은 뉴욕시 일원에 100곳이 넘고 이 중 현재 전시가 진행되는 장소도 약 30곳에 이른다.

예술인에게 주어지는 도움의 손길은 이뿐만이 아니다. 뉴욕시 브루클린의 대형 쇼핑몰 ‘시티 포인트’는 1층의 넓은 스튜디오를 곡예사들의 연습 공간으로 개방했다. 이곳은 넓은 통유리로 꾸며져 있어 지나다니는 방문객들은 이들이 연습하거나 쇼케이스하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뉴욕시의 공연예술계는 지난 1년 동안 팬데믹의 충격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달 뉴욕 회계감사원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으로 1년 만에 공연예술계 일자리가 66% 증발했다. 지난해 3월부터 도시 전면 봉쇄로 모든 오프라인 공연이 중단되면서 이들이 대거 실업자가 되고 만 것이다. 모든 업계를 통틀어 봐도 가장 큰 고용 충격이다.

이런 현상은 뉴욕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예술 분야 종사자 83%는 팬데믹으로 인해 자신의 일자리에 충격이 생겼고, 88%는 소득이 줄었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에 나왔다. 그나마 근로계약을 맺고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은 정부의 실업급여 등 보조금이라도 제대로 받지만 1인 자영업자들은 이마저도 지원을 받기 힘들다고 예술인들은 말하고 있다.


즉석 야외공연으로 무대에 활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원이 17일(현지 시간) 스튜디오에서 병원과 복지시설에 무료로 배포할 성악 동영상을 녹화하고 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이달 12일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스퀘어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가수와 댄서,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이날은 작년 봄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브로드웨이가 전면 폐쇄된다는 소식이 발표된 지 딱 1년이 된 날. 이들은 1년간의 긴 침묵을 깨며 거리에 모여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춤과 음악 등 작은 공연을 선보였다. 비영리단체들의 후원으로 이뤄진 이날의 깜짝 공연은 방역을 위해 미리 공지하지 않고 열렸다. ‘We will be back(우리는 돌아올 것이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행사는 말 그대로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극장이나 콘서트장이 문을 열고 관객들을 받겠다는 굳은 다짐에서 비롯됐다.

그런 다짐은 이제 곧 현실이 될 분위기다. 얼마 전 뉴욕 주정부는 4월 초부터 정원 대비 33%, 100명 이하의 관객을 받는 조건으로 실내 공연장이 문을 열 수 있다고 밝혔다. 입장 전에 모든 사람이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았다면 최대 입장 인원은 150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 다만 브로드웨이 등의 대형 뮤지컬 극장, 공연장들은 이런 인원 제한으로는 수지 타산을 맞추기가 어려워 실질적으로 실내 공연을 재개하는 시점은 올 9월은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맨해튼 첼시 지역의 유서 깊은 라이브 댄스 극장인 ‘조이스 시어터’ 역시 올가을 오프라인 공연 재개를 목표로 준비에 한창이다. 이곳은 작년 팬데믹 기간 내내 극장 차양에 ‘We will dance again(우리는 다시 춤을 출 것이다)’이라는 사인을 붙여 놔 화제가 됐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센트럴파크나 타임스스퀘어, 워싱턴스퀘어파크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에서도 즉석 야외 공연이 부쩍 늘어났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연하는 뉴욕 어퍼웨스트의 링컨센터는 올가을까지 문을 닫지만, 다음 달부터는 실내가 아닌 외부에 아웃도어 공연장을 만들고 관객들을 맞이할 계획이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작년에 인기를 모았던 ‘뉴욕필 밴드왜건’ 콘서트를 다시 추진 중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뉴욕시 곳곳에서 픽업트럭 등을 이용해 버스킹을 하며 다니는 것이다.

뉴욕주와 시 당국도 공연예술계 지원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뉴욕주는 ‘뉴욕 팝스업(NY PopsUp)’ 프로그램을 도입해 공원 등 도심 곳곳에서 즉석 콘서트를 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일정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게릴라 콘서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특징이다. 뉴욕시도 ‘오픈 컬처(Open Culture)’라는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거리 공연을 희망하는 예술인들에게 도시의 여러 지역을 개방하기로 하고 공연 허가 신청을 받고 있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