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블록 구조 엔진 ‘스리 리터’
엔진 제조기술 불완전한 당시
견고한 설계로 내구성-성능 발휘

벤틀리 스리 리터는 창업자 W. O. 벤틀리의 이상을 실현한 첫 모델인 동시에 이후 벤틀리 차들의 성격을 뚜렷하게 규정한 모델로 의미가 크다. DM Historics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그러나 월터 오언 벤틀리(W. O. Bentley)가 회사를 만든 1919년에는 일반 소비자들이 벤틀리가 만든 차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해 벤틀리는 시험용 차를 완성하고 영국 런던에서 열린 모터쇼에 시험 제작한 차를 선보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시험용 차는 기술적으로 미완성 상태였고, 판매가 가능한 차를 완성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벤틀리 역사의 첫 시판 모델이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인 즉 1921년의 일이다. 즉 벤틀리의 공식 첫 차, 스리 리터(3 litre)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스리 리터는 창업자 W. O. 벤틀리의 이상인 ‘빠른 차, 좋은 차, 동급 최고의 차(A fast car, a good car, the best in its class)’를 실현한 첫 모델이다. 아울러 당대 일반 승용차에서 보기 어려웠던 설계 개념과 최신 기술이 폭넓게 쓰여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으로 인기와 호평을 동시에 얻었다. 그러나 벤틀리 역사에서 스리 리터가 갖는 의미는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한 세기 남짓 이어지고 있는 벤틀리 차들의 성격을 뚜렷하게 규정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엔진의 다른 부분에도 혁신적인 기술들이 반영되었다. 흡배기 효율을 높여 성능을 높이는 멀티 밸브 설계를 반영한 것은 물론 실린더에 스파크플러그를 두 개씩 달아 더 강력한 힘을 끌어냈다.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등 가벼운 소재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런 기술들이 일반 승용차용 엔진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만큼 벤틀리의 기술은 시대를 앞섰다. 엔지니어로서 W. O. 벤틀리의 재능과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스리 리터의 엔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벤틀리 엔진 고유의 동력 특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벤틀리 차들은 전통적으로 엔진 회전수가 낮을 때에도 충분한 힘을 내어 거침없이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리 리터의 엔진에도 그런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의도적이면서 우연한 것이기도 했다.
1923년 르망 24시간 경주에 처음 출전한 벤틀리 스리 리터. Concours of Elegance 제공
나아가 이런 엔진 특성은 4단 수동변속기와 어우러져, 장거리를 달릴 때에도 회전수를 비교적 낮게 유지하며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나중에 벤틀리의 이름을 높인 고성능 그랜드 투어링 모델의 이름인 콘티넨털도 그와 같은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대 최신 기술이 총동원된 스리 리터의 직렬 4기통 엔진. London Classic Car Show 제공
W. O. 벤틀리는 처음에는 르망 24시간 경주 출전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스리 리터로 출전을 준비하던 존 더프의 설득으로 1923년에 처음 열린 경주를 지켜본 뒤 마음을 바꿨다. 이듬해인 1924년에 더프와 동료인 프랭크 클레멘트는 벤틀리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르망 24시간에 출전해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벤틀리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이어 1927년 한층 더 개선된 스리 리터 슈퍼 스포츠는 경주 도중 사고로 크게 파손되었음에도 완주해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스리 리터는 당대 부호와 왕족들에게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현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즉위 전에 구매했던 차로도 유명하다. 1921년부터 1929년까지 생산된 1622대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소수다. 일반 판매 전에 시험용으로 만들었던 EXP 2는 복원 작업을 거쳐 벤틀리가 보유하고 있어 유명 클래식카 관련 행사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된 스리 리터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2011년 열린 한 경매에서 96만 2500달러(당시 환율로 약 11억880만 원)에 낙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