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니콜라예프의 1969년 작 리놀륨 판화.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제공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내부 전경. 석영중 교수 제공
지옥에서 다시 태어난 대문호
형기를 마치고 수도로 귀환해서 쓴 자전적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갱생의 방식과 응시의 방식을 같은 맥락에서 다룬다. 주인공 고랸치코프에게 감옥은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가두는 곳이다. “담장에 난 틈새를 통해 하늘의 가장자리만을 볼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인고의 시간이 지나간 후, 틈새 앞에 고정된 시선이 담장을 넘어 무한한 “푸른 창공”으로 뻗어나갈 때 비로소 그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해방된다. 주인공의 갱생은 그의 제한된 시야가 확장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란 얘기다.
인간을 향한 ‘깊이 보는 시선’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에 전시된 족쇄. 도스토옙스키는 약 5kg의 족쇄를 유배 기간에 계속 차고 있어야 했다. 석영중 교수 제공
고랸치코프에게 시선의 해방은 ‘깊이 보는 법(seeing-in-depth)’의 습득에서 시작된다. “표면에 씌워진 껍질을 벗겨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주의 깊게 알맹이만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민중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짐승들 사이에 섞여 있는 깊고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보았고 무한한 선과 무한한 악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그 광대무변함에 놀라다 못해 경외감까지 느꼈다.
“사람의 알맹이는 모두 같더라”
극과 극이 공존하는 인간 본성의 전 스펙트럼을 눈 속 깊이 들여오는 동안 주인공의 시선은 바깥이 아닌 자신의 내부로 돌려졌다. “나는 내 지난 생애 전체를 되돌아보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다시 끄집어내어 과거를 깊이 복기하고 용서 없이 엄격하게 스스로를 평가해 보았다.” 날카로운 통찰의 눈이 그의 내면을 사정없이 파고들어 그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암흑의 심연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알맹이’도 무식한 흉악범의 알맹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사람이다.”
주인공의 깊이 들여다보기는 넓게 보기로 연장된다. 혐오로 핏발 선 그의 눈에 어느 순간부터 부드러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누가 이 파멸해 가는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을 헤아려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모든 세상의 비밀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그는 “그 어떤 낙인도 족쇄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공동의 불행 속에서 기묘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의 갱생은 슬그머니 상생의 비전에 중첩된다. 이때 이후 인간의 눈으로 “인간 속의 인간”을 발견한다는 명제는 도스토옙스키의 도덕 철학으로 굳어졌다.
‘인간 속의 인간’을 발견하다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인물의 깊이 보는 시선에 동참할 때 일어나는 것은 우리 내면의 변화다. 깊이 보기와 깊이 읽기(deep reading)는 어느 틈에 결국 같은 것이 된다. 깊이 읽다보면 시베리아 오지의 황폐한 유배지는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둡고 누추한 지하실이 된다.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 때 그 지하실은 갱생을 위한 공간으로 전변하고 희망이 섬광처럼 우리를 비춰준다. 소설의 독서가 주는 가장 큰 보상이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