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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 왜 늘고있나[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1-03-27 03:00:00

트럼프 “코로나는 쿵후 바이러스”… 아시아계 혐오 부채질




미국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한 공원에서 21일(현지 시간)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증오범죄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 \'아시아계 증오를 멈추라\' 등의 구호가 쓰인 손 팻말이 보인다. 뉴욕=AP 뉴시스

잇따른 총격 사건으로 미국 전체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의 우려와 불안이 커지고 있다. 16일 미 남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의 희생자 8명 중 6명이 아시아계였고 백인 남성 용의자 로버트 에런 롱(21)의 범행 동기가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일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미 사법당국 관계자들이 롱에게 ‘증오범죄(hate crime)’ 혐의를 적용하지 않을 가능성을 잇달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오랫동안 미국 내에서 ‘모범적 소수자’, 즉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로 평가받았던 아시아계에 대한 고정관념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아시아계를 의사 법조인 등 고소득 전문직종에 주로 종사하는 성공한 이민자의 전형처럼 그리는 행위를 말한다. 소수에 불과한 일부 사례를 일반화하다 보면 대다수 아시아계가 겪고 있는 심각한 차별을 인정하지 않거나 축소하는 분위기가 짙어진다. 지난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 운동 등을 통해 인종 갈등이 미국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지만 아시아계는 주류 사회가 만든 ‘모범적 소수자’란 틀에 갇혀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 급증

지난해 미국에서는 아시아계를 노린 증오범죄가 급증했다. 비영리단체 ‘증오 및 극단주의 연구센터’는 지난해 미 16개 대도시의 전체 증오범죄가 2019년보다 7% 감소했지만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는 무려 149%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가장 큰 이유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이 책임을 중국에 돌린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태도가 꼽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내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 ‘쿵후 바이러스’ 등으로 지칭했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1일 보고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아시아계와 연관지은 것이 아시아계 대상 범죄 증가로 이어진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인 지지층을 의식해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내에서 코로나19가 처음 창궐하던 지난해 3월 뉴욕 맨해튼에서 한국계 여성이 길을 가다 머리채를 잡히고 폭행을 당했다. 한 달 후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아시아계 여성이 염산 테러를 당해 머리와 목 등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두 피해자 모두 아무 이유 없이 공격을 당했다. 이런 ‘묻지 마 범죄’는 올 들어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22일 CNN은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뉴욕에서 벌어지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폭행 중 3분의 1은 증오범죄일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추라’에 따르면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이 이뤄지는 장소는 직장(35.4%), 공공장소(25.3%), 공원(9.8%), 대중교통(9.2%) 등 공개된 장소가 대부분이었다. 피해 유형은 언어 차별(68.1%), 기피(20.5%), 물리적 폭력(11.1%) 순이었다. 인종적으로는 중국계(42.2%), 한국계(14.8%), 베트남계(8.5%) 등이 많았다.

○ ‘아시아계 차별 없다’ 뿌리 깊은 편견

단순히 코로나19와 트럼프 행정부의 실정만이라고 하기에는 전염병 대유행 이전부터 미 사회 전반에 흐르는 아시아계에 대한 질시, 편견, 잘못된 고정관념 등이 상당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마디로 ‘공부 잘하는 당신들이 주류 백인 못지않게 잘 먹고 잘사는데 무슨 차별을 받느냐’는 논리다. 일각에서 아시아계를 ‘백인 근접(white-adjacent) 집단’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2019년 미 인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 가구의 중위소득은 9만8174달러로 백인(7만6057달러), 히스패닉(5만6113달러), 흑인(4만6073달러)보다 높다. 코로나19에 따른 봉쇄 조치로 흑인, 히스패닉 저임금 근로자가 큰 타격을 받은 것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시아계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서부 워싱턴주 레이시의 노스서스턴 공립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시아계에 대한 주류 사회의 질시와 편견을 잘 보여준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아시아계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이들을 ‘유색인(colors)’이 아닌 ‘백인(whites)’ 집단에 포함시키려 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철회했지만 후폭풍이 거셌다.

25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는 가발 등 미용용품을 판매하는 한인 여성이 자신의 가게에서 흑인 여성 5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코뼈가 부러졌다. 가해자들은 “아시아인들은 흑인에게 가발을 팔면 안 된다. 이들이 우리 돈을 훔치고 있다”고 폭언을 했다. 현지 매체 휴스턴크로니클은 아시아계를 노린 증오범죄인지 경찰이 수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2014년 시작된 후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하버드대 아시아계 역차별 소송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시아계 학생 단체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FA)’은 2000년 이후 하버드대 입학 전형에서 탈락한 아시아계 지원자 자료를 분석해 아시아계가 역차별을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1심, 2020년 항소심에서 하버드대가 승소했지만 SFFA는 지난달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SFFA는 하버드대가 학업, 과외활동 등 다양한 평가 항목 중 주관적 평가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인성(personality) 부문, 즉 호감도, 용기, 친절함 같은 모호한 지표에서 유독 아시아계에게 낮은 점수를 줘 합격률을 의도적으로 낮췄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최상위권 아시아계 학생이 하버드대에 입학할 확률은 13%에 불과했지만 같은 점수의 흑인 학생이 입학할 확률은 60%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아시아계는 기계처럼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인기가 없고 매력적이지 않은 ‘너드(nerd)’여서 하버드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아시아계 인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다. 인종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아시아계 미국인을 한 묶음으로 뭉뚱그리려는 시도 자체가 이치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로 동아시아계와 인도계가 거둔 경제사회적 성공의 이미지를 피부색, 미 정착 역사, 문화 등이 판이한 다른 동남아계 등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의미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모국이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 사이에서도 주류 사회에 진입한 사람과 식당, 술집,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등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심한 편이다.

NBC뉴스는 아시아계가 다른 소수인종에 비해 체제 순응적이며 괴롭혀도 반격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 또한 아시아계 대상 범죄 급증과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쉽게 반격하지 못할 것 같은 만만한 이미지 때문에 아시아계 노인, 여성 등이 특히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 왜곡된 아시아 여성 이미지

역사적으로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에 취약했으며 남성보다 저임금 산업에서 일해 온 아시아계 여성은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추라’에 따르면 아시아계 증오범죄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68%)으로 남성(29%)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이미지 왜곡 및 편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오랫동안 미 문화 콘텐츠가 아시아계 여성을 백인 남성에게 성적(性的)으로 복종하는 대상으로 묘사했다고 진단했다. 베트남전을 다룬 1987년 영화 ‘풀 메탈 재킷’에는 미군 두 명이 베트남 여성을 놓고 ‘가격’을 흥정하는 가운데 이 여성이 군인들을 향해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시아 여성이 가난과 전쟁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성(性)을 매개로 미국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식이다.

애틀랜타 연쇄 총격 사건을 수사하는 조지아주 체로키카운티 경찰의 기자회견에서도 이런 흔적이 엿보인다. 경찰은 롱의 범행 직후 그가 ‘성 중독’일 가능성이 있다며 “유혹을 없애고자 범행을 벌였다”고 발표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범행 동기가 ‘성 중독’과 관련됐다는 경찰의 주장이 오히려 증오범죄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질타한다. 레이숀 레이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18일 보고서에서 롱이 애틀랜타에 있는 수많은 마사지숍 가운데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곳만을 표적으로 삼은 것을 두고 “범인은 인종차별주의자 겸 성차별주의자”라며 범인이 진술한 ‘성적 동기’를 인종 증오와 분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동기 입증 및 처벌 어려워

입증과 처벌이 어려운 증오범죄 자체의 특성도 빼놓을 수 없다. 특정인을 증오범죄로 처벌하려면 범인이 평소 특정 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는 것과 그 증오가 범행으로 이어졌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범행 자체만 입증하면 처벌할 수 있는 일반 범죄와 달리 규명이 쉽지 않다. NBC뉴스는 범죄의 ‘결과’보다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증오범죄는 형법상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진단했다. 당국 또한 동기 입증이 쉽지 않을 때는 대부분 증오범죄가 아닌 일반 범죄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NYT는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를 증명하는 일이 흑인, 유대인, 성소수자 등 다른 소수집단 혐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고도 분석했다. 흑인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과거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을 모방해 범행에 올가미를 쓸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증오범죄에서도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문양 등이 자주 쓰인다.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는 이 같은 전형적 상징이 없어 당국이 아시아계를 대상으로 한 범행에 증오범죄 혐의를 적용하는 것을 꺼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언어 장벽, 체류 자격 등의 어려움이 있는 저소득층 아시아계가 인종 증오범죄 신고 자체를 꺼린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여파로 최근에는 미국 밖에서도 비슷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4일 독일 타게스슈피겔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아시아계 독일인의 80%가 인종차별적 공격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19 발발 후 1년간 캐나다에서도 아시아계, 특히 여성 및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크게 늘었다고 CBC 방송 등이 23일 보도했다.

호주에서는 백인 여성이 한국계 임신부에게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붓는 동영상이 등장해 공분을 일으켰다. 25일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에는 서부 퍼스의 한 병원을 찾은 한국계 호주인 부부에게 백인 여성이 폭언을 퍼붓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등장해 우려를 낳고 있다.

조종엽 jjj@donga.com·이은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