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김동식’ 재판 때 치밀한 논리 … ‘모해위증’ 의혹은 주장뿐 증거 없어
3월 22일 경기 과천시 법무부 청사에 출근한 박범계 법무부 장관.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이른바 ‘한명숙 구하기’가 실패했다. 고검장들도 참석한 대검찰청 부장회의가 큰 표 차이로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교사’ 의혹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뒤끝’이 남았다. 박 장관이 한 전 총리 사건 수사 과정에 대해 합동 감찰을 지시한 것. 그는 “(대검 측에)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검토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합동 감찰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합리적 과정’이다. 박 장관은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대검찰청 차장검사가 고검장을 포함한 확대 부장회의를 열겠다고 하자 수용했다. 막상 자신이 원하는 회의 결과가 나오지 않자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일 수 있다.
간첩 김동식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2008년 출간한 ‘박범계 내 인생의 선택’ 표지. [사진 제공 · 출판시대]
박 장관은 2008년 ‘박범계 내 인생의 선택’이라는 저서를 냈다. 이 책 75~76쪽에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95년 경찰 대공(對共)파트는 충남 부여군에서 북한 직파간첩 검거에 나섰다 실패했다. 당시 군 병력이 출동해 1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했다. 생포된 이가 바로 김동식 씨다. 2013년 김씨는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출간해 북한 공작원 활동을 자세히 설명했다. 과거 북한은 남측 출신자를 공작원으로 한국에 침투시켜 공산혁명을 위한 지하당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분단 후 반세기가 흐르자 이들도 노쇠해 한국 침투가 어려워졌다. 결국 서울·경기와 말투가 비슷한 황해도 출신 엘리트 소년을 선발해 공작원으로 양성했는데, 그중 한 명이 김씨였다.
김씨와 접촉하려고 한 10명과 실제 접촉한 7명의 이름이 나오자 수사가 확대됐다. 김씨 주장에 따르면 이 7명에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허인회 씨 등이 있었다. 김씨 주장대로라면 7인을 만나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고 밝혔다. 다만 김씨를 접촉한 사람들은 그를 안기부 프락치로 의심해 믿지 않았다. 이 중 3명은 공안기관에 김씨를 신고했지만 나머지 4명은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훗날 김씨는 ‘(간첩이라고 밝힌 나를)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낸 것이다.
모해위증 증거는 어디에?
안기부와 검찰은 대한항공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 씨처럼 중요 자백을 해 ‘북한 도발의 증인’이 된 이는 기소를 보류하고 보호한다. 김씨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와 접촉했음에도 신고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허인회, 함운경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 중 함운경 사건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부에 배당됐는데, 박범계 장관이 당시 배석 판사였다.
박 장관은 저서 ‘박범계 내 인생의 선택’에서 “김동식은 당시 안기부에서 공소 보류 상태였지, 유죄 확정 판결이 나지 않았다. 김씨가 간첩임을 전제로 그와 만난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주장에) 반대한 재판장과 갈등했다”고도 언급했다. 당시 박 장관은 자기주장을 관철하고자 30쪽에 이르는 판결문을 작성해 부장판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결국 부장판사는 그의 주장대로 선고하지 않았지만 후임 재판장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
박 장관이 내세운 합동 감찰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모해위증이 사실이어야 한다. 모해위증이 사실이려면 한 전 총리가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한 전 총리 동생이 건설업자 계좌에서 나온 수표를 사용했음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 전 총리 측에 돈을 전달한 건설업자의 동료 재소자가 위증하도록 검찰이 교사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82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