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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깜빡해 고개 숙인 전인지…필드의 황당 실격[김종석의 TNT타임]

입력 | 2021-03-28 11:29:00


LPGA투어 KIA클래식 2라운드에서 티샷을 하고 있는 전인지. 전인지는 이날 경기 후 스코어카드에 서명을 하지 않아 실격됐다. LPGA 제공

전인지(27)는 202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나 상승세를 타고 있다. 3개 대회 연속 톱10에 들며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평균타수 공동 2위(69타)에 상금랭킹 8위(약 1억3000만 원)에 올랐다.

올 들어 자신감을 회복하며 미소를 보일 때가 많아진 전인지의 질주에 급제동이 걸렸다.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의 아비아라골프클럽(파72)에서 열린 KIA클래식 2라운드를 마치고 스코어카드에 서명을 빠뜨린 채 제출하고 경기장을 떠났다가 실격됐다.

전인지는 이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저는 오늘의 뼈아픈 실수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팬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또 “훌륭한 대회를 개최해주신 기아 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면서 3, 4라운드에서 나서는 모든 선수의 선전도 기원했다.

LPGA투어는 선수들이 제출한 스코어카드를 정리하다 뒤늦게 전인지의 사인이 빠진 사실을 발견하고 규정에 따라 실격 처리했다. 전인지가 실격되지 않았다면 1,2라운드 합계 5언더파 139타로 공동 4위에 올라 3라운드에 나설 수 있었다. 4개 대회 연속 톱10 이상의 성적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본인 뿐 아니라 팬들도 안타깝게 됐다.

골프는 심판이 따로 없는 에티켓과 명예의 게임이라고 한다. 자연에 맞서 자신과 싸움을 하다보니 규칙과 관련된 희한한 상황에 부딪치기도 한다. 황당한 실격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대한골프협회 한 경기위원은 “세계적인 선수가 그런 실수를 한다는 게 아쉽다. 명색이 프로인데도 규칙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학창시절부터 규칙 교육도 스윙, 성적만큼이나 중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실탄이 없으면 플레이도 관둬야

골프 규칙은 선수가 18홀 라운드를 마칠 때까지 같은 제조사는 물론 모델까지 같은 공을 쓰도록 규정한다. 이른바 ‘원 볼 룰’. 없으면 다른 선수에게 빌리거나 골프장 안에서 용품을 파는 프로샵에서 사와도 된다.

스코틀랜드 커누스티를 비롯해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오픈(디 오픈) 개최 경기장은 대부분 바닷가에 자연그대로 조성한 링크스 코스. 잡초가 무성하고 개울이 많아 공의 무덤으로 불린다. 집 나간 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프닝도 쏟아진다. 한국의 한 프로 선수는 브리티시오픈 예선에 출전했다가 공을 10개도 넘게 잃어보려 결국 실격당하기도 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조차도 공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2019년 유러피언투어 터키시 에어라인오픈에서는 에디 페퍼렐이 해저드에 공을 4,5개 빠뜨린 뒤 더 이상 공이 없어 실격되기도 했다.

한국 여자골프의 인기스타 김하늘. 동아일보 DB

인기스타 김하늘은 2009년 KLPGA투어 힐스테이트 서울경제오픈 1라운드에 공 4개를 갖고 출전했다가 OB 한 방에 이어 해저드에 공을 세 차례 빠뜨려 16번 홀에서 ‘재고’가 바닥났다. 당시 김하늘의 사용구는 2007년형 ‘타이틀리스트 프로 V1x’ . 같은 조였던 서희경과 유소연, 자신의 바로 앞 조였던 안선주, 김보경, 최혜용은 모두 다른 공을 쓰고 있었다. 한 갤러리가 비슷한 공을 전달했으나 이번에는 ‘연식’이 달라 쓸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갤러리가 갖고 있던 공 한 개가 정확하게 일치해 무사히 라운드를 마칠 수 있었다.


●나침반, 연습도구도 잘못 쓰면 중도하차

한국과 일본여자 프로골프투어에서 간판스타로 활약한 ‘엄마 골퍼’ 안선주는 캐디의 실수로 실격되는 보기 드문 경험을 했다. 2013년 일본투어 니치레이디스 2라운드에서 캐디가 바람 체크를 한다며 갖고 있던 나침반을 활용한 것. 이 캐디는 프로골퍼와 계약된 전문캐디가 아니라 골프장 소속 하우스 캐디였다. 평소 주말골퍼 캐디를 할 때처럼 무심코 나침반을 꺼낸 것. 하지만 라운드 도중 인공의 장치와 비정상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는 실격에 해당되는 골프 규칙이었다. 골프장 측은 지배인 명의로 안선주와 대회 주최 측에 사과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베테랑 골퍼 줄리 잉크스터. 경기 도중 스윙연습 보조기구를 사용했다가 실격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 DB

베테랑 골퍼 줄리 잉크스터는 경기 도중 파3홀에서 앞 조가 너무 밀려 오랜 기다림에 지루해지자 스윙 연습도구를 휘둘러보다가 실격되기도 했다. 선수가 경기 중 스윙 보조 기구를 사용해도 바로 실격이었다.

이같은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온갖 첨단 IT 장비가 도입되는 세상과도 동떨어진다 지적이 거세지면서 골프규칙을 관장하는 R&A와 미국골프협회는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있다. 대한골프협회에 따르면 2014년부터 바람 방향이나 잔디결 방향을 판단하는데 도움받기 위한 나침반 사용은 허용됐다. 연습도구 관련 규정 역시 2016년부터는 처음 썼을 때는 2벌타를 받으며 다시 사용하면 실격되는 것으로 완화됐다.


●시청자 고발로 보따리 싸는 일은 이젠 그만

경기 후 스코어카드를 낸 뒤 중계를 본 시청자가 대회 측에 전화를 걸어 룰 위반을 지적해 뒤늦게 벌타를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틀린 스코어카드에 사인한 것이 되는 경우가 실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통사고로 재활 중인 타이거 우즈. 우즈는 전성기 시절 유리한 규칙적용을 받을 떄가 많아 특혜시비를 부르기도 했다.

타이거 우즈는 2013년 마스터스에서 공을 물에 빠뜨린 뒤 드롭을 잘못한 사실이 시청자 제보를 통해 뒤늦게 드러나 실격 위기에 몰렸지만 2벌타를 부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돼 특혜 시비를 불렀었다. 반면 파드리그 해링턴은 2011년 유럽 투어 대회에서 볼 마커를 집어 들다 공을 살짝 건드리는 실수를 해 2벌타를 받아야 했지만 이 사실을 모른 채 스코어 카드를 제출한 뒤 시청자 제보로 다음 날 실격 처분을 받기도 했다.

2016년 개정된 규칙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틀린 스코어카드를 제출했을 경우 실격이 아니라 벌타만 부과하게 됐다. 선수가 규칙 위반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시청자 제보 등으로 뒤늦게 벌타를 받게 될 경우 스코어 카드 오기로 실격되는 조항이 삭제된 것. 원칙적으로 삭제됐으나 시청자 제보가 실격에 해당되는 사안인 경우는 예외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