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한옥 대산루 전경(오른쪽 아래 사진). 대산루는 두 칸 마루와 한 칸 온돌방으로 구성된 단층 건물에 ‘T자’ 형으로 이어진 2층 건물로 이뤄졌다(위 사진). 부엌과 아궁이 공간으로 구성된 1층 위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누마루와 온돌방, 서고가 이어진 2층이 올라앉아 있다. 임형남 대표 제공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과연 그럴까? 사실 조선은 생각보다 혁신적이고 훌륭한 제도와 사회구조를 갖춘 나라였다. 또한 철학자들이 세운 나라였다. 성리학을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조선의 정치인들은 일선에서 물러나면 철학적 사상을 가다듬고 제자를 길렀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철인정치’가 조선에서 어느 정도 구현된 것이다. 또한 건축과 조경, 분청사기나 백자 등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조선만의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조선은 사대부가 만든 나라다. 사대부의 등장은 고려 말 농사법의 혁명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모내기와 2모작 그리고 불역전법의 시행으로 농업의 생산량이 괄목할 정도로 증가하였고, 경제적인 상황이 나아져 이때부터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자식의 교육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예전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부모의 후원으로 생계 걱정 없이 공부를 한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인 계층으로 형성되는데, 그들이 사대부란다. 점심과 조선 건국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 무척 재미있다.
한옥에 대해서도 편견이 있다. 기와지붕에 단층집이라는 식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옥의 인상은 아주 단순하다. 그 기본형은 대부분 북촌에 있는 도심형 한옥에 머물곤 하는데, 그것은 1930년대 주택사업가 정세권이 당시 경성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개발한 양식일 뿐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온돌을 주된 난방 형식으로 삼았기에 전통가옥들은 모두 1층으로만 지었다는 생각도 오해다. 조선 중기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판방, 즉 마루방에서 주로 입식으로 살았고, 구들은 제한적으로 환자 등을 위한 일부 방에 설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왕도 침상 아래에 숯을 담은 화기를 넣어 침상을 데우는 방식으로 살았다고 한다. 온돌이 대중화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라고 추정된다.
사실 예전에는 2층 한옥도 꽤 있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도 2층 한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조선 시대에 지어진 2층 한옥이 지금도 존재한다. 경북 상주에 있는 ‘대산루’가 대표적인데, 그 집은 정경세라는 인물과 연관이 있다.
우복 정경세(1563∼1633)는 조선 중기의 인물이다. 그는 서애 류성룡이 기른 제자이자 퇴계의 학맥을 잇는 남인이었으며 서인인 김장생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예학을 정리했다. 또한 대표적인 전통건축으로 손꼽히는 병산서원을 지을 때 주도적 역할을 했다. 말년에는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상주로 내려와 학문을 갈무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대산루를 남기게 된다.
대산루는 두 칸 마루와 한 칸 온돌방으로 구성된 단층 건물에 ‘T자형’으로 이어진 2층 건물로 구성된다. 부엌과 아궁이 공간으로 구성된 1층 위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누마루와 온돌방과 서고가 이어진 2층이 올라앉아 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기거하는 강학 공간은 남향의 단층으로 구성하고, 서재와 침실 등 사적 공간은 좀 더 들어간 안쪽에 2층으로 배치한 구성이 무척 합리적이다. 한옥의 온돌집은 1층이라는 고정관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구조이고, 공간을 교묘하게 겹쳐 놓은 것이 평면만 보면 요즘 설계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역사란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고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조선의 문화와 건축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오해들을 되짚어보고, 뛰어났던 과거의 성과들을 찾아서 이어가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